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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8회 국민강좌] 다시 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 국학원
icon 정길선
icon 2012-04-06 11:33:07  |  icon 조회: 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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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8회 국민강좌] 다시 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 국학원

[8회 국민강좌] 다시 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나홍주



19세기 말 일본의 무력침략에 대항할 만한 국방력이 없던 조선왕국과 그 왕실을 지키기 위하여 명성황후가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구사하여 외교력으로 대항했으나 그 한계가 있었다.


근대 우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임에도 우리 역사책에서 누락되어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헤겔(George Wilhelm Friedrich Hegel)이 말한 성찰적 역사의 시각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고종황제의 황후, 명성황후를 알기위해서는 당시 우리나라에 주둔했던 외교관들의 말을 빌려야 한다. 왜냐하면 대다수 우리나라사람들은 최근대사인 우리나라역사마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명성황후를 시아버지와의 불화로 권력싸움을 일삼은 못된 며느리, 민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제 대 황후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겸비한 정치가였음이 밝혀졌다. 미국 공사 서기관 William Franklin 은 명성황후에 대해 자신의 저서에 밝히기를, 개성이 강하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의 여성이었으며 시대를 훨씬 앞선, 여성을 초월한 정치가로 부군의 이익을 지키는데 열열하고 예민하였다고 했다. 전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도 아름다운 성품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귀부인으로 칭송했고 미 공사관 서기관 Dr. Horace Allen은 명성황후는 개성이 강한 분으로 아세아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꼽았으며 그의 서거는 진보적 이념에 대한 지주(支柱)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했다. 언더우드 씨 부인 (Mrs. L.H. Unerwood )도 영특하고 애국적인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는 계획에 차질을 주는 혼란의 원천이요, 바윗덩이와 같은 장애물이었다고 했다.

서구과학이 물밀 듯 밀려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계의 열강들이 각축전을 벌리는 국제정세에 즉각 대처하지 못한 조선왕조는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 체결로 국내?외로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고전했다. 1873년 정한론을 내세운 일본의 계획적인 강압에 일본식 군대 별기군이 만들어지고 그 여파로 신?구간의 불만이 고조되어 임오군란을 겪고 내부사건임에도 불고하고 일본과 청나라가 이 땅에 거주하는 빌미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암담한 국운을 막아보려고 청나라의 힘을 빌려 일본침략을 막고자 했으나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미국을 끌어들이려고 운산금광 채굴권을 미국계 사업가(James R. Morse)에 부여했다. 그러나 여의치 못했다. 그리고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여 자국 의사에 관계없이 요동반도(遙東半島)를 청나라에 반환하는 것을 보고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기울게 되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1885년 4월 15일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으로 발생한 영?러시아간 다툼이 충돌직전에 타결되었고, 이로써 형성된 영?러 양국간은 한반도를 완충지대화 할 것을 책정하고 일본의 지나친 조선왕국에 대한 무력간섭을 견제하려 했다. 이때 아직 러시아를 견제할만한 국력이 없던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번번이 무산시키는 화근덩어리인 명성황후를 근본적으로 제거코자 했다.

1895. 4. 17 청일강화조약 체결 후 일본은 노골적으로 한반도에 세력을 확충하고 이때부터 조선 조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일본인들은 조선 조정의 각료들을 매수하거나 친일파를 각료로 등용토록 강압하였다. 특히 당시 대륙진출을 부르짖던 일본의 비밀결사 요원인 오까모도(岡本柳之助)를 조선 궁내부 고문으로 채용토록 강요하였으며, 실제적으로 이 자는 궁내부고문으로 채용되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현장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이 실질적으로 조정을 장악했던 7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충무로 일대에선 명성황후를 시해 할 것이란 음모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었다. 8월에는 명성황후의 반대파인 김홍집이 총리가 되었고, 7월말 귀국했던 이노우에 공사 후임으로 9월 1일에는 거칠기로 악명 높았던 일본군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三浦梧樓)가 부임했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새벽 5시 30분경 이 날은 일본군사와 조선옷을 입은 일본인들 60명이 조선왕조 궁궐 담벼락에 사다리를 놓고 몰래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불태워 암매장하여 증거인멸을 한 날이다. 참으로 비인도적이요, 비문화적인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조선왕국의 국모시해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일본공사 미우라의 당초 명성황후 시해 계획은 실질적으로는 일본군 수비대를 주력으로 하고 여기에 일본공사 관원, 영사경찰, 조선거류 일본인들과 훈련대를 추가해서 한 뭉치가 되어 실행키로 되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명성황후에 대한 대원군과 훈련대의 구데타의 형식을 취하고 경복궁 침입에서 민비 암살까지 야음을 틈타서 결행하되, 그 실행대가 대부분 다 일본인들로 되어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하는 안(案)이었다. 결행은 11월로 예정했으나 1895년 10월을 맞이하여 미우라는 민비 암살 결행일을 10월 10일로 앞당겨 결정했다. 그런데 10월 7일 아침 조선 군부대신 안경수(安坰壽)가 일본공사관에 와서 “내일 훈련대를 해산키로 했는데 승인을 받고 싶다”고 했다. 훈련대가 해산되어 무기를 반납해버리면, 그들이 대원군을 받들어 쿠데타를 결행했다는 위장은 성립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우라와 스기무라 서기관은 “오늘 저녁 즉시행동을 개시하여 내일 동이트기 전까지, 일을 끝내버리면 훈련대는 그대로 왕궁의 경호를 맡을수 있다.”는 의견을 모았다. 미우라공사의 명으로 우마야바라(馬屋原務本)소령 지휘하의 1개 대대가 경복궁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한 가운데, 1895. 10. 8(음력 8. 20) 새벽 5시 30분경 동이 트기 전 미명(未明)에 경복궁내 건천궁의 명성황후 침실 옥호루를 습격했다. 그들은 일본군 장병, 일본공사관 관원들 및 낭인(浪人)들로 그날 중요한 역할을 한 자사랑(紫四郞)과 월성광(月成光)은 서울거류 일본인이 아니라, 미우라 부임시 동행한 자들이었다.


Allen 서기관이 국무부 장관에 보낸 서류에 보면
“본인은 새벽 5시에 총성으로 잠에서 깨었으며, 그때에 이조부 대신 이범진이 와서...대궐에서 첫 비상경계령이 나오자 고종황제께서 본인을 입궐하라는 하명을 하시어 모시러 왔다고 하여 입궐하였다. (중략) 명성황후는 일본인 무뢰한들에 의하여 시해되었고, 그 유해는 범죄를 인멸하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화장되었다는 것을 본인은 믿지 않을 수 없음” 증인의 말 “현인택이란 조선인 대령은 군복을 입은 채 (다른 장교들은 군복을 찢어 던지고 달아나 버림) 홀로 싸우다가 일본인 침입자들로부터 빠져나와 명성황후를 구하려고 침전으로 뛰어 갔으나, 그들에게 구타당하고 쓰러졌으며, 명성황후가 다른 방으로 뛰어 들어 가는 것을 보았음.”을 기록하고 일본 정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왕국 국민에 사죄한 바가 없다. 고 보고한 바 있다.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45세였던 황후가 너무 젊고 고운 것에 의심을 품고 임오군란 때 처럼 도망친 것이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 궁녀를 차례대로 데려다 갑자기 시신을 보이고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그들도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하여 처음에는 관련을 부인했으나 유럽 열강의 항의에 당면하여, 일본정부는 미우라 등 48명을 일본으로 연행하여 히로시마(廣島)지방법원 특별부 재판에 회부하였다. (1895.10.) 그러나 그다음 해 2월 그들 범인들 48명 전원을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석방했다.

2000만 명의 백성을 가진, 명색이 주권 독립국가이던 조선왕국의 국모가 평화 시 자국의 구중궁궐 안에서 불법 내습한 외국인들의 만행에 의해 잔인무도하게 시해 당하였으니 당시 고종황제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일체 음식을 전폐하고 미 외교관이 제공하는 음식만 들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2000만 국민들은 가만히 있었을까?
시종 임최수는 소식을 듣고 일찍 입궐하니 세자가 명성황후가 보이지 않으니 찾아보라는 말에 상황을 바로 알았지만 말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창의를 모의할 생각을 했다.


당시 개화파이건, 수구파이건 간에 국모가 대궐에 불법 침입한 외국인 범죄자들에 의하여 시해당하고 있을 때,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1876년 일본은 대조선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선린우호를 다짐하고 상호주권을 존중하여 침월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약문서(병자수호조규)로 확약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불법 침입했던 자국 정규군대를 동원하고, 자국 공사관원을 동원하여 민간복장으로 변장시켜서 주재국 국모시해란 만행에 가담케 하고도 선린우호를 말할 수 있고, 침략행위를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고도 역사와 하늘의 심판을 두려워 할 줄 모른다는 말인가. 이러한 천인공노할 만행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그 당시 조선왕국의 백성들에게 사죄한 적이 있는가? 그 후라도 사죄한 적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도 역사와 하늘 앞에 떳떳할 수 있을 것일까. 또한, 조선왕국 백성으로서, 이처럼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국모를 상실하고도, 그들 일본인 범인들을 체포하여 의법처단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자주독립국가의 떳떳한 국민이요, 일찍이 만주대륙을 호령하던 백의민족의 후손으로서 그 기백을 간직하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비록 만족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을망정, 그때 우리 조상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의연히 궐기하여, 그들 일본 범인들과 그 하수인들의 손아귀로부터 고종황제를 구출하고, 그 범인들을 체포하여 서울에서 국제회의를 열어 그들을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단함으로써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고, 그들을 응징한다는 분명한 목적 하에 을미왜란평정창의를 과감하게 일으켰던 것이다. 비록 배신자 참령 이진호(李軫鎬)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실패는 했을망정, 그간 일제식민지사관의 영향으로, 이 창의가 가리워지고 폄하되어 왔다. 이제 그 진실이 어느 정도 밝혀진 만큼 마땅히 재평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제 시종 임최수(侍從 林最洙)와 참령 이도철(參領 李道徹)의 창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을미왜란평정창의 관계 국외자료 내용>
“1895. 11. 27 밤과 동월 28일 아침 사이에 대궐을 탈취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동 시도는 고종황제에게 자유를 회복시켜주고, 정권을 탈취한 내각을 벌주기 위하여 전 수비대의 일부장교들에 의하여 행하여졌으나, 대궐에 있던 그들의 동료들의 배신으로, 대궐문이 열리지 아니하였고, 그들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이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참 고 : 을미왜란 평정창의 의거로 체포된 소위 주동자가 ‘33인’ 이었다는 것은 1919. 3. 1 독립선언서상 조선민족대표 ‘33인’의 뿌리가 되었을 것이며,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국내자료>
‘춘생문사건’으로 알려진 동 창의는 역사 서적에는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
시해사건 마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을미사변이 일어나 민비가 일본인들에 의하여 시해되었다”는
내용으로 2줄~3줄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근간에 와서는 이 내용마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을미왜란평정창의(乙未倭亂平征倡義)의 진상>
1)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1895. 10. 8 새벽 05:30경 발생했으나 동사건의 그날 아침 09:00경 발족한 소위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 시해사실을 은폐하고, 3일 후인 1895. 10. 11(음력 8. 23) 대궐에서 소란이 나자 고종황제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거짓 구실을 부쳐, 왕후를 폐하고 서인(庶人)으로 격하시켰음을 서울 주재 각 공사관에 통보했다.


2) 그러나 국내외의 압력에 못이긴 친일 김홍집 내각은 서울 주재 각국 공사들 입회하에서 1895. 11. 26 비로소 명성황후 서거를 공표하였다. 그리고 명성황후를 왕후로 복위시켰다는 내용을 서울 주재 각 공사관에 통보하고 그전 배포했던 폐위통지서는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照會 제23호. 음력 10월 11일...大君主陛下勅旨 王后閔氏 復位)


3) 을미왜란평정창의 주도자는 당시 고종황제를 모시고 있었던 시종 임최수(侍從 林最洙, 당년 43세)로 충청도 연산(連山) 출신이고, 가장 중요한 동지는 제천 출신의 참령 이도철(參領 李道徹)이었다.
임최수 시종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전날 밤 숙직을 하고 집에서 잠을 자는 중에 대궐에서 왜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대궐로 뛰어와서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왕세자를 상면했으나, 둘 다 겁에 질려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왕세자가 귓속말로 왕후가 보이지 않으니 찾아보라고 하여 궁녀들에게 수소문한 결과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 당한 것을 알고, 국모의 원수를 갚고 고종황제를 일본인들 하수인 손아귀에서 구출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한편, 참령 이도철은 평양에서, 대궐에 일본인들이 난입한 소식을 듣고, 세상을 한탄한 끝에 사직하고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시종 임최수는 이도철을 찾아가서 난세를 이야기하던 끝에 의기투합하여 창의를 모의하고, 그동안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드디어 11월 26일 친일내각이 외압에 못 이겨, 명성황후 서거를 공표하게 되었다. 이에 백성들이 울분에 떨게 되자, 바로 그 익일인 11월 27일 밤 거사키로 하여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동참했던 대궐수비대 참령 이진호(參鈴 李珍鎬)가 미리 약속한 대궐문을 열어주지 않고, 사전에 일본군에 밀통하여 일본군 1개 중대가 갑자기 대궐문 안에서 물밀듯이 나오면서 발포하여 주모자들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뒤따르던 사람들은 패주하였다. 이때 약 1,000명의 대중이 참여하였으며 일부는 대궐 담을 넘어 들어갔으며, 안에서 체포되었다.


4) 창의 행동계획
1단계 : 1895. 11. 27 밤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28일 새벽에 춘생문(春生門)을 통하여 대궐에 진입. 고종황제를 역당의 수중에서 구출한 후 고종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역당들을 처단하여 국내를 우선 정상화시킨다.


2단계 : 고종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창의통문을 전국 8도에 발송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외적(外賊)과 결탁한 역당들을 소탕하여 국가 권위를 확립한 후, 이 땅에서 각국대표가 참석하는 국제회의를 소집하여 일본인 범인들을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거 처단한다.


참 고 : 시종 임최수(侍從 林最洙)는 일본인 범인들 하수인들에 의하여 현장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는 바, 애국충정으로 넘치는 피고 임최수의 문초기록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몸에서 흐르는 선혈로 쓴 그의 유서를 여기에 밝혀, 만고의 충신 시종 임최수의 영혼을 미력이나마 위로코자 한다. 고종황제가 아관파천 후, 그는 충민공(忠愍公)의 시호를 받았고, 문관으로는 유일하게 “장충단”에 모셔 졌다.


① 피고 임최수 초초(初招)
“창의하여 일할 모의를 내고 생각을 발한 것은 실상 본인이요. 나를 수괴로 다루는 것은 의(義)로 보아 피할 마음이 없소. 마음으로 통탄할 일은 8월 20일(음력)의 국모시해 범인들이 지금까지 잠잠하고, 이를 성토한다는 소리가 아직 들리지 않는데, 오늘의 본인은 도리어 역적의 이름을 쓰게 되었소...내 몸이 시종직에 있으면서, 8월20일 사변 뒤 군부(君父)의 안위를 알 수 없고, 국모가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막연하여 알 수 없고 걱정과 분함에 격하여, 살아 있는게 죽은 것만 같지 못하다. 과거지사 나라에서 국모를 폐비한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모두 그때에 임금님이 하신 일이고, 많은 신하들이 오히려 죽음으로 간쟁한 바가 고금 역사에 잘 나와 있는데 어찌하여 오늘 같이 조정의 간사한 무리들이 외국인과 짜고서 전에 없던 짓을 하게 되었는가? 그래서 위태로운 국부를 붙들어 드리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끌어들여 의(義)를 일으켜서 간당(奸黨)을 제거하고 왕국을 붙들어 지키고저 함이지 결코 위를 범하고 흉한 기도를 한게 아니오. ...외국공관에 거병의 뜻을 보냈는데, 정동 각 공관에는 도와달라고 하였고, 일본공관에는 너희들과 관계없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소.” (特別法院,開國 504년10.14 被告 林最洙初招)


② 유서(피고 임최수)
“... 임금님 사랑하기를 아비 사랑하기보다 더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보다 더 하였도다. 오호, 하늘과 해가 붉은 마음에 비친다 하였거늘, 멀고 먼 저 푸른 하늘은 어찌도 그리 무심한고 ! 아 죽은 뒤에 다시 이 의리(義理)를 이어서 일어날 사람이 없으면, 이것이 한(限)이로다.” (乙未倭亂復讐倡義秘史編纂會,明成皇后 (천안: 도서출판 삼정회,1998), p.253.


다. 창의의 평가
만일 창의가 성공했다면 전국 8도에 나붙을 창의통문을 통하여 격분한 백성들이 대거 의병에 몰려들었을 것이고, 역당들은 소탕되고 국권도 다시 확립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1885년 4월 15일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으로 형성된 영?러 양국간 한반도 완충지대화 정책으로 일본의 무력간섭은 견제를 받았을 것이다.


1909. 10. 26 09:30 만주 할빈역두에서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시해를 주도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대한인(大韓人)으로서 응징한 것은 사필귀정이요, 이등박문이 지은 15개 죄목 중 명성황후 시해의 죄를 그 첫 번째로 꼽은 것은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었다 할 것이다.


일찍이 미국 하바드대학 교수 죠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는 지적했다 :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저주받아서 그 과거를 되풀이 하게 된다.”


일본인 범인들을 체포하고, 서울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하여 만국공법에 의거 그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시종 임최수(林最洙)가 주도한 ‘을미왜란평정창의(乙未倭亂平征倡義)’도 함께 기억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책에서 가장 중요한 이들 사건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우려할 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역사, 특히 조선왕국의 국권을 상실했던 참담한 역사적 사건들로 얼룩진 근대사의 정리 없이도, 역사상 우리가 서 있는 현 우리의 좌표를 정확히 인식하고, 다가오는 미래에 과연 올바로 대응하여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우리 모두 현명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때 조선왕국이 힘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요, 힘이 없었던 근본원인은 난국을 당하여 만 백성들이 서로 협력하고 합심하지 못하였던 데서 온 치욕적 역사이다.
2012-04-06 11:3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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