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국학원> [10회 국민강좌] 유적유물로 파헤친 단군문화 - 국학원
icon 정길선
icon 2012-04-09 13:25:26  |  icon 조회: 3437
첨부파일 : -
<국학원> [10회 국민강좌] 유적유물로 파헤친 단군문화 - 국학원

[10회 국민강좌] 유적유물로 파헤친 단군문화
구자일 | 재야사학자, 구자일신경정신과 원장



‘한단고기’가 나온 지 꽤 오래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고대역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역사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관이 흔들리면 민족보다는 자신만을 위한 권력행사가 난무하기 마련이다. 투철한 역사관을 살리기 위해 중요한 것은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이 있는 삼국의 역사도 잘 알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 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기록되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고대사를 바로 잡으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려를 충분히 알고 난 후에 신라와 발해, 백제, 고구려를 확인하고 신화나 설화 속에 묻힌 단군시대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단군역사를 찾는데 장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하나가 진시황 때 쌓은 만리장성이다. 중국교과서에는 이 만리장성이 우리나라 북쪽 황해도까지 그려져 있다. 이는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병도가 스스로 황해도 수안까지 만리장성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통탄한다.


고구려의 역사서가 없으니 중국사서 [원사지리지]를 참고 한다.
1)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처음으로 평양에 도읍하여 살았다.
2)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拔平壤), 고구려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압록수 동남 천여리로 옮겨가니 옛 평양이 아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지금 평양은 고구려의 옛 평양이 아니며 고대 압록수는 현재 평양에서 서북으로 천리니 현재의 요하가 당시 압록수 임을 알 수 있다. (현 압록강은 400리)


‘삼국유사’에서도 안시성은 환도성이고 안시는 요수 북쪽이며 요수는 다른 말로 압록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엔 현 평양 대동강성벽에 6세기경에 새겨진 ‘한성(漢城)’이라는 각서가 있다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김유신의 군사 행로에서 황해도 수안군에서 3만6천보 거리에 고구려 평양이 있다고 한 기록은 대동강으로 도망간 지금의 평양으로 고구려 말기에 한성을 평양이라 부르고 거기서 멸국 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이 외에 중국의 송서, 수서, 요사, 지리지, 대원일통지 등 여러 사서를 통합해 볼 때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은 현재 북한에 있는 평양이 아니라 중국 요양시 태자하에 있는 동북 동경성으로 만주에 있음이 확실하다.


‘신당서’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가 699년에 중국에서 안동도독으로 임명받아 구 고구려영토를 다스렸다. 고덕무의 신고구려국은 820년까지 120년간 비록 중국에 조공은 바쳤지만 독자국으로 존재하였다가 발해 대인수황제에게 복속되었다. 서기 700년에서 820년까지는 남북국(신라와 발해)시대가 아니라 신삼국(신라, 발해, 신고구려) 시대였다.


중경에서 600리 거리에 발해 상경이 있고 발해는 구국에서 300리 되는 홀한하 동편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대원일통지’ 상경고성 편에 상경고성은 숙신 땅이고 발해 대씨가 상경으로 고치고 금나라가 상경회령부라 하였고 남쪽으로 건주(솔빈부 건주)가 있고 상경 서쪽에는 빈주(솔빈부)가 있다. 또 서쪽에 황룡부가 있었는데 발해 홀한군이고 용천부라고도 했다. 결국 발해 홀한강은 송화강, 중경은 장춘시, 상경은 아성이 확연하다. 현 하얼빈 아성에 있는 금나라 상경이 동시에 발해 상경성인 것이다. 금나라 상경 터 발굴도(發掘圖)에는 두 개의 성터가 ㄴ자로 겹쳐 있다. 북성과 남성을 나누는 중앙 성벽에 옹성문이 남쪽방향이다. 쌍성이 되고도 북성이 남쪽 성 안에 분명한 황궁터가 또 있으니, 이는 발해 황궁일 수밖에 없다. 발해성이 허물어지고서 그 북방에 금나라 아골타가 성채를 지은 것이다. 옛 발해국은 장춘시 유수현 노하침 유적지변 대파고성이며 솔빈부 건주치다. 이 곳은 지금 숙신의 후예를 자처하는데, 수나라 때 기록과도 같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 홀본은 빈주로 바뀌고 다시 할빈으로 불렸다. 영안현의 동경성은 원래 발해의 동경성으로 지금까지 그 이름을 그대로 쓴다. 그 곳에서 ‘물한주도독’이라는 관인이 나왔으며 현재도 모란강이다.

기록외에 유물로도 우리 상고시대를 증명할 수 있다.
서풍현 낙선향에서는 철검 고분 70개와 고구려 초기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집안에서 진솔선고구려(晉率善高句麗) 관인이 발견되니, 진나라 때 고구려 수도이며 압록강 변 집안성은 동천왕이 피신하였던 동옥저 지역이다. 안시성은 환도성, 즉 관음각산성(7000m)이고, 건안성은 고구려 장안성을 중국에서 고쳐부른 것이다. 오골강 오골성은 오녀산성이다. 전에는 오이고성이라 했었고, 환웅이나 단군이 백두산에 제사지내러 오던 성으로 추정된다.


백제
서울에 백제 위례성이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집안에 수 만개 고구려 고분군이 있고 경주에 신라 고분군이 많은 것과 달리 서울에서는 백제 고분군을 볼 수 없다. 공주에 있는 무녕왕릉은 벽돌로 만든 전실 고분이다. 이런 고분은 황해도, 평안도에 무수히 많다. 소위 낙랑고분으로 알려진 것들이다.
일본 나라현의 기토라 고분은 백제 귀족들의 고분인데 거기서 나온 천문도에는 북위39도 밤하늘이 보인다. 즉 평양 땅이 백제사람들의 고향인 것이다. 이로 황해도 봉산의 대방태수 장무이묘를 보고서 황해도 봉산이 한사군 대방군이라고 우기는 것은 왜곡이다. 우리 역사책에 백제 대방태수 장무가 472년 개로왕의 사자로서 중국에 갔다고 했다. 따라서 이 백제인 대방태수 장무와 부형 관계인 백제인 대방태수 장무이로 고려하면 468년경에 묻힌 것이 되고 당시 황해도는 백제 땅이 분명하다.


‘일본서기’ 흠명천황조에 549년 백제 성명왕은 신라와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얻고 전진하여 평양을 쳤다. 6군을 얻어 고지를 수복했다는 기록과 같은 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그리하여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고구려, 백제가 도살성과 금현성에서 싸울 때 신라가 두 성을 가로챈 ‘삼국사기’ 기록과 같다.


황해도 예성강 상류는 위라천이다. 두 말을 합치면 위례성강이다. 예성강은 부여면에서 내려오고 평산에는 태백산성이 남아있다. 자모산성과 철봉산성이 호위하는 태백산성의 모습은 부여시의 부소산성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고찰로 태백산성은 475년까지 백제의 위례성이자 개로왕이 죽은 한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근초고왕의 한산성은 바로 대동강 평양이 된다. 서울은 백제나 고구려의 한성이 아니라 신라의 북한산이었다.


‘만주지리풍속지’에서 봉황성은 광개토왕이 백제에게서 빼앗은 성이라고 전한다. 391년 이전에는 최소한 압록강까지 백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진의 연호인 영화 13년 안악 3호분은 고구려가 한반도에 진입하기 전의 백제 고분이다. 안악3호분과 비슷한 행렬도는 요양시 벽화 고분 중에도 있다. 위영지령 장모(공손부인묘) 고분 벽화와 주제 형식이 거의 같다.또한 안악고분 주인과 쌍둥이처럼 비슷하게 그린 고분벽화는 조양시 원대자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346년 전연국의 침략으로 5만명의 백성과 함께 조양으로 끌려가서 부마가 되고 장군이 된 부여왕 여현의 묘로 볼 수 있다. 여현은 백제왕이 아닐까?

빗살무늬 토기는 BC 6000년 전의 동이 문화의 특징으로 산동반도 대문구문화(BC 5000 -3000년)와 한반도, 압록강 집안, 요동의 대련반도 소주산문화, 심양의 신락문화(BC 5500년), 길림시 서단산문화와 장춘시 좌가산문화, 그리고 서요하 상류, 내몽고 적봉시 홍산문화(紅山文化 BC 5500년)까지 고루 발견된다.
부신시(阜新市) 사해(査海)문화 / 예문화


中華第一村, 華夏第一龍이라 명명하는 부신시(阜新市) 사해(査海)문화지는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라 일컫는 유적지이다. 이 곳에서 빗살무늬 토기와 농경 토템의 개구리, 뱀 모형과 함께 수신(水神)과 왕권을 상징하는 용 토템과 옥기가 나왔다. 용 비늘모양의 몸체가 그릇을 감싸듯이 부조된 두 건의 질그릇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용 토템이며 옥부(玉斧)와 옥비(玉匕), 옥결 등, 옥기제품 20여점도 최초의 옥기(玉器)이나 월절서(越絶書)에서 신농, 혁서 때에는 석병(石兵)을 쓰고 황제시대(BC2700년)에는 옥병(玉兵)을 쓰고, 하우(夏禹; BC2100년) 시대에는 동병(銅兵)을 쓰고 그 이후엔 철병(鐵兵)을 썼다고 했는데 사해문화에서 옥병출현은 중원보다 훨씬 빠른 BC 6000년이므로 중국 이전의 예족의 유물일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곡식을 저장하였고 또 익혀 먹기 위해 질그릇을 만들었다. 개, 돼지 등 가축도 등장하는데 모계사회로 농사가 정착 된 것으로 보인다.

적봉시(赤峰市) 홍산문화(紅山文化) 배달 신시 문화 / 맥족 환웅 도래
몽골계 환웅의 등장은 모계 사회에서 남성 군장 사회로의 이동을 상징한다. 파림우기(巴林右旗) 나사대(那斯臺) 조각에서 남자와 여자의 돌조각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남자는 35cm 높이에 미간까지 보호하는 투구를 썼고 의자에 걸터 앉아 있으며 두 손은 떨어져나갔다.


여자는 높이 33cm로 머리 앞면을 앞가리마를 갈라 머리위에에 삼층으로 돌려 얹었으며 두 손은 합장하고 무릎을 꿇었다. 여자상과 함께 발굴된 석수상은 높이 9cm, 길이 14cm의 작은 곰 형상이다. 이는 단군 신화에서 환웅과 웅씨 처녀의 만남을 상징하는 것이다.


홍산문화는 BC 3500년에서 BC 2200년까지로서, BC3898년에서 BC 2333년까지 한웅시대이므로 한웅시대와 일치한다. 홍산문화의 특징은 정교한 옥기(玉器)의 사용, 돌을 사용한 석묘(石墓), 그 외에도 진흙 여신상(女神像)이 다수 출토되었다. 당시 채도문이 유행했고 이미 구리 채광과 제련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문화는 적봉시(赤峰市)의 노하하(老哈河)와 조양시(朝陽市)의 대릉하를 따라 대릉하의 우하량(牛河梁) 유적지, 능원(凌源), 부신(阜新) 유적지, 내몽고의 부하(富河) 문화의 중심 기원이 되고 서쪽으로는 북경시 서쪽의 장가구(張家口), 동쪽으로는 요하(遼河)를 지나 요동반도까지 상통한다.


18세 환웅의 이름이 전하는데 대개 지명이다.
1세 배달 환웅은 거발환(居發桓) 2세는 거불리(居佛理), 3세는 우야고(右耶古), 4세는 모사라(慕士羅) 5세는 태우의(太虞儀), 6세는 다의발(多儀發), 7세는 거련(居連), 8세는 안부련(安夫連), 9세는 양운(養雲), 10세는 갈고(曷古), 또는 독로한(獨盧韓), 11세는 거야발(居耶發) 12세는 주무신(州武愼), 13세는 사와라(斯瓦羅) 14세는 자오지(慈烏支) 또는 치우(蚩尤), 15세는 치액특(蚩額特) 16세는 축다세(祝多世), 17세는 혁다세(赫多世), 18세는 거불단(居弗檀)이다. 배달은 밝은 땅이라고도 하는데 나라 이름이고 신시는 홍산으로 추정된다. 사와라는 13대 환웅 이름이자 식요락수, 시라무렌 즉 서요하 물을 가리킨다. 14대 환웅 치우는 고향인 극성에서 중국으로 들어갔다. 바다 수위의 상승되고 황해가 넓어지므로 인해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신무기인 청동 무기가 있었다. 치우는 용산문화를 일으켰고 뒤에 은나라 왕실로 문화적 혈통이 이어진다.

신민시(新民市) 고대산(高臺山)문화 / 단군 문화
치우 환웅이 떠난 만주 땅에 사와라 환웅의 후손을 자처하는 웅씨족 왕검이 통일을 하고 사와라 환웅의 신시에 들어가 제천을 하니 조선국이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로 추적하면 단군 왕검은 단허(壇墟)에서 나와 진한(辰韓)에서 조선으로 개국하였다. 단허는 환인의 오녀산성으로 추정된다. 왕검 선조의 구택, 즉 고향인 것이다. 진한은 개모성으로 보아서 신민시 엽무대다. 무엽산에서 유래한다.


‘삼한관경본기’에 진한의 남쪽이 살수로 당시 남해안이라 했다. 진한에 의해 명명된 발해 진주는 본래 개모성이었다는데, 지금의 개주시지만 요나라가 옮긴 것이다.


단군 문화가 곧 고대산 문화인데 창무시 평안보, 신민시 고대자, 법고현 정가방 만류가 유적지를 중심으로 하며 청동기 초기 시대 문화로 무문삼족기(심양시 신락 상층문화, 하가점 하층문화로 연결됨)와 토갱수혈이 특징이다.

단군 조선의 천년 수도 소밀랑
2세 단군 부루는 난하변 남이를 세우고 푸른 옷을 입게 하고 신시 배달국을 강조한다. 6세 단군은 소밀랑으로 천도한다.


대릉하 발원지 능원의 우하량(소밀랑) 적석총 유적지가 천년 단군릉에 해당한다. 그 남쪽 육주하, 난하 등에 번한이 있었다.


후단군 시대는 서우여의 기자조선과 후단군으로 나뉘는데, 서우여의 기자조선이 옛 번한과 마한, 진한을 거의 다 가지게 되었고 후단군 조선은 막조선(말갈)인 송화강부터 내몽고 등 북쪽 지역을 가졌다. 영고탑은 중국말로 닌구타 라는 뜻으로 육가자라고 하는데, 오르도스의 스키타이 청동기 문화, 내몽고 음산의 암각화 문화와 관련이 있다. 이 후단군 수도는 진시황에게 뺏겼다고 하므로 음산 아래로 보인다.


서우여의 기자조선은 대릉하를 중심으로 백악산 아사달도 차지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말려들어서 은나라 기자의 후손과 위만에게 침탈당한다. 쌍월식 화폐인 붕(朋)에 이은 명도전은 기자조선의 화려한 무역 경제를 말해준다. 기자의 청동 유물은 대릉하 상류 객좌에 있고, 일부는 북경시 외곽 유리묘에서 발굴되었다.


후단군조선의 중심이 다시 동쪽으로 돌아와 요하 상류에 해성 평양 등 수도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부여로 바꾼다. 해성은 팔면성 위치로서, 1190년 기록된 요동행부지 저자 金王寂은 팔면성에서 단금상에 향을 올린다. 대부여는 해모수의 북부여로 바뀐다. 이후 한무제의 침략을 당하고 고구려로 이어진다.
2012-04-09 13:25:26
61.32.117.16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