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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14회 국민강좌] 옹기의 원류를 찾아서 - 국학원
icon 당산대형
icon 2012-04-12 13:06:14  |  icon 조회: 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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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14회 국민강좌] 옹기의 원류를 찾아서 - 국학원

[14회 국민강좌] 옹기의 원류를 찾아서
나선화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으로 가장 손쉬운 것은 문헌기록이다. 그러나 문헌기록이 없는 경우에는 전통 생활방식에서, 유적, 유물에서 역사를 복원하고 철학과 종교사상까지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미비하고 민족정체성마저 모호한 이때 아직까지 우리에게 흔하게 남아있는 옹기로써 역사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옹기는 장독대나 부엌, 곳간 등 우리나라의 어디서나 사용되는 필수품으로 빈부격차나 계층, 지역에 구분이 없이 폭넓게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나라의 도자기하면 중국문화가 유입돼 발전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만을 문화재로 알고 보물로 여기지만 실로 중요한 보물은 옹기이다. 우리는 너무 흔해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생활의 구조가 아파트문화로 바뀌면서 저장용으로 제조용으로 쓰이던 옹기가 이젠 자리만 차지하는 쓸모없는 것으로 벼려진지 오래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돌보지 않고 있을 70년대 중반, 일본을 위시하여 유럽이나 미국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옹기를 닥치는 대로 수거해 가고 가마터와 도기, 자료들을 수집함에 뒤늦게나마 연구, 조사하니 이미 거대한 옹기들은 일본으로,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 있었다.


쓰임새가 다양한 옹기는 밀폐시켜도 저절로 숨을 쉬는 특성이 있어 된장, 간장, 김치, 젓갈 같은 발효 음식을 장기간 저장할 수 있고 같은 원리로 물을 담아두어도 금방 상하지 않고 곡식을 넣어 두면 다음해까지 썩지 않았다. 저장용뿐 아니라 식수를 길어 나르는데 사용하는'수박동이'와 '귀때동이' 는 운송용으로 이동하기 편하게 손잡이가 달려있다. 그 외 제조용기로 소주를 만들어내는 소줏고리, 찜기용 시루와 시신을 담는 옹관까지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생활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런 옹기의 연원은 어디서부터이고 언제부터일까?


아직까지 많이 쓰고 있는 옹기가 기록은 없어도 기록에 버금가는 간접자료로 18세기의 화가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근거자료로 남아있다. 16세기초 조선시대 궁궐모습을 묘사한 승불도에 그려진 옹기의 모습과 고려생활사를 기록한 고려도경에 남아 있는 물항아리의 묘사와 A.D. 3세기의 고구려 안악 제3호 고분벽화에도 시루, 항아리가 있다. 간접적인 자료들을 통하여 바닥이 편평한 고구려 도기 항아리의 형태가 전승되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 직접적인 자료로는 유물이 있다.


현존하는 옹기항아리의 기본 형태는 목이 없는 넓은 입에 어깨부터 풍만한 둥근 항아리와 손잡이가 양쪽에 옆으로 붙어 운반하기 좋은 동이와 자배기, 길고 좁은 병, 장군 등과 시루, 뚝배기 등 다양하다.
특히 항아리는 식품을 저장하고 꺼내는데 편리하도록 넓은 입에 바닥이 편평한 둥근 항아리의 기원은 중국황화유역의 신석기 시대인 앙소문화(仰韶文化)에서 찾아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 (청동기시대) 무문토기 항아리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무문토기 항아리는 부여 송국리 유적지에서 나온 것으로 현재의 항아리와 동이가 유사하며 고구려토기와도 같다. 1998년 발굴한 아차산성의 고구려 유적(6세기)에서 출토된 도기에는 오늘의 장독대에서도 볼 수 있는 옆으로 붙인 손잡이달린 물동이, 시루, 자배기, 윗면이 편평한 쟁반모양의 항아리 뚜껑이 지금 것과 똑 같은 것이다.

아차산성 고구려 도기와 같은 배가 둥근 독, 옆으로 넓은 띠 손잡이가 달린 동이가 나타났는데 옹기형은 중국한대의 토기와는 계통을 달리하고조선, 고구려로 이어지는 문화권에 왔다고 할 수 있다. 밑바닥이 둥근 신라, 가야의 도기항아리는 고려시대에 와서 사라지고 바닥이 편평한 고구려도기의 형태가 고려로 계승되고 조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구려시대 이후 고려ㆍ조선에서는 완형으로 현존하는 유물의 예가 많지 않아 고증이 어려우나 생활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 황룡사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평저항아리, 시루, 동이가 있고 발해유적에서 출토된 손잡이 있는 큰 단지와 경기 화성의 매곡리 13세기 도기가마터 동이, 시루의 출토로 형태가 계속 전승되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덧띠무늬 토기나 즐문토기 기법이 같은 방법으로 이어지고 옹기도 최근까지 두드려 쌓아 올리는 선사시대 토기로부터 옹기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성형기법을 계승하므로 옹기는 중국자기의 영향 하에 생산이 시작된 청자?백자와는 계통이 다른 고조선 토기 전통이며 그 기형의 정착은 고구려도기에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표면장식기법 역시 삼국시대 고구려ㆍ백제토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던 형태가 전승되고 손가락 마디로 눌러 찍은 무늬와 돌대를 등 간격으로 돌리며 흙띠를 손으로 눌러 찍는 돌대장식은 신석기시대 토기와 삼국시대 마한의 옹관 등 고대 토기에 나타난 기법과 같은 형태이다. 이 같은 장식기법과 무늬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므로 그 성형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옹기의 장식기법의 연원도 고대 토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흰 모래가 섞인 유색점토를 사용하는 도기는 선사시대 토기로부터 삼국시대 고구려 도기, 마한 유역의 옹관, 고려시대 도기, 시유도기에 쓰이고 9세기 구림도기에도 사용되었다. 이는 모두 지질학적으로 동일한 계통의 원료를 채취한 상태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연 상태로의 유색점토사용은 석영질의 굵은 모래가 섞여 내화도를 높이고 기공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통기성을 높게 하여 우리의 식생활에 필요한 발효용기, 저장용기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근세의 옹기가마에서도 옛 방식대로 잿물을 쳤듯, 지금도 전라도 지방 옹기에서는 논흙과 잿물ㆍ약토를 섞어 옹기 유약을 제조하고 있다. 이는 흙으로 집을 짓고 흙으로 생활도구를 만들고 나뭇잎이 썩어 만들어지는 부엽토와 재를 섞어 만든 잿물을 입혔다. 가마 안에 넣고 구울 때 나무가 타면서 생기는 검댕이(연기)가 옹기의 안과 밖을 휘감으면서 저절로 자연적인 방부성 물질이 입혀지고 그래서 조심만 하면 백년 이상 쓸 수 있다. 설혹 쓰다 깨지더라도 청자, 백자보다 훨씬 빠르게 흙으로 변하기 때문에 흙을 오염시키지도 않는다. 우리 몸에 크게 해가 되지 않는, 자연에 가장 가까운 그릇, 옹기의 특징들이다.


큰 독 짓는 기술이나 띠에 세 개의 선을 고수한 문양과 이동경로는 옹기문화에서 단순히 우리민족의 삶의 모습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복원하고 연구 할 가치 있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옹기가 역사의 분신임을 알고 그 속에는 우리의 기원까지 담겨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가치를 아는 미국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는 옹기를 전시하고 싶다고 요청하지만 보존상 어려움으로 거절하고 있다.
2012-04-12 1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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