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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18회 국민강좌] 高句麗史와 중국의 ‘東北工程’ 추진배경 - 국학원
icon 당산대형
icon 2012-04-16 13:13:03  |  icon 조회: 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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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18회 국민강좌] 高句麗史와 중국의 ‘東北工程’ 추진배경 - 국학원

[18회 국민강좌] 高句麗史와 중국의 ‘東北工程’ 추진배경
여호규 |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



중국학계는 1990년대부터 고구려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고구려를 중국사로 귀속시키는 논리를 일반화시키고 있다. 우리에게 고구려는 무엇이고 어떤 존재인가? 그동안 우리 학계나 정부는 중국의 연구동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거나 대응하지 않았다. 중국이 어떤 논리로 고구려를 편입시키려 하는지의 연구동향을 파악하고 그 대응책을 마련하는데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고구려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고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웅대한 나라로 알고 있다. 고구려는 단순히 거대한 만주를 지배했던 영토와 찬란한 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에게 고구려가 중요함은 우리역사에서 고구려역사를 빼놓고서는 우리의 역사 사실을 구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원을 전 후로 사람들의 분포는 만주를 중심으로 만주중부와 한반도에는 예맥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만주동부지역은 숲에서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는 숙신계 집단으로 수렵생활을 하는 말갈, 여진 만주족의 조상이고 서부는 반농반목으로 농사와 가축을 기르는 선비족과 거란족의 조상이다. 당시 한족(漢族)은 황하유역에 자리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2천년을 넘게 내려오다가 송화강 유역에서 부여국이 일어섰다. 그러나 BC 108년 중국 한 무제에 패한 고조선의 영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고 고구려가 건국하며 다시 한사군을 퇴치하였다.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고구려가 이어 받은 것이다.


고구려 건국세력은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농경을 영위하던 예맥족이다. 고구려 건국 당시 정세는 56국이나 되는 대 혼란기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시대의 정벌은 영역이 확장되어 고구려 영토를 넓히는 것뿐만 아니라 옥저, 동예, 북옥저 등 서로 다른 정치체제의 예맥족 전체를 한 국가로 통합했다는 사실이다. 한강유역의 백제나 신라인도 같은 예맥족이었다.


그 후 삼국통일 시 백제는 신라와 통합되었고 고구려의 일부는 신라로, 원산 이북은 당나라로 속했다. 그러나 그곳의 원주민들이 결집하여 발해를 건국하였다. 고구려역사 일부는 신라로, 또 다른 일부는 발해가 이어 받은 것이다.


발해의 멸망 시에 발해왕은 10만 명의 주민을 끌고 고려에 귀속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발해의 우리민족이 고구려에 이어 또 한번 고려에서 통합된 것이다. 이러한 우리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가 고구려역사를 잃는다면 우리가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곧바로 계승하지 못하고 끊기는 것과 같다.


중국과학자들은 ‘중국은 자고이래(自古以來)로 통일적 다민족국가였다’는 논리를 기본 전제로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민족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변경지역(邊境地域)의 소수민족에 대한 통합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영토 지상주의 역사관’을 확립하고 무수한 소수민족역사가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사로 둔갑하였다(孫祚民 등의 비판).


중국은 1980년대 전반까지는 고구려사를 백제?신라의 삼국으로서 한국사로 설정하였을 뿐 아니라 수?당의 고구려 원정을 대외 침략전쟁으로 국제관계사로 정의하였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과 요녕성(遼寧省) 환인(桓因) 일대에서 고구려 유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면서 고구려는 예맥족(濊貊族) 계통으로서 유구한 역사와 고유한 문화를 가졌으며 동이(東夷) 가운데 가장 강대한 민족으로 이해되었다.


중국은 1949년 정부 수립직후 성립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그동안 왜 적용하지 않았을까? 중국 동북지방의 정세와 북한과의 관계가 1980년대까지는 비교적 안정된 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고구려 정통성을 주장하는 북한의 반발을 살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비록 옛 고구려 영역 일부가 현재 중국 영토에 속하지만 고구려족 계통이 명확하게 한민족(韓民族)과 연관될 뿐 아니라 중국 영토밖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1985년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고대 민족관계사(국제관계사)를 파악하는 입장이 일반화되고 이에 따라 고구려사도 중국사로 귀속(歸屬)시키려는 견해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 사회가 동요하고 북한이 체제위기에 몰리면서 만주도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는 지역으로 변모했다. 이에 중국정부는 만주지역의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연구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동북공정 추진의 직접적 계기로는 2001년 ‘재중동포의 법적지위에 대한 특별법’ 과 2002년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 세계문화유산 신청’ 거론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이 1996년부터 준비했다기보다는 장기적인 국가전략상 추진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귀속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고구려사의 출발점인 한민족의 기원을 한국사로부터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이에 종전 견해를 계승하여 고구려의 족원을 맥족(예맥족)이나 부여족으로 보면서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고구려인의 족원이 맥족이나 부여족으로 설정할 경우 고유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고 한국사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단절할 수 없다. 이에 고구려선조가 상인(商人)에서 분리되었다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일주서(逸周書) <왕회편(王會篇)>의 ‘고이(高夷)’를 고구려 선인(先人)으로 설정하므로 서주(西周)에 신복(臣服)?조공(朝貢)하였다고 파악하고 고조선?부여와 다른 별개 민족으로 설정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고이를 중국 전설상의 인물인 전욱(?頊) 고양씨(高陽氏)의 후예로 설정하거나 염제족(炎帝族) 후예라고도 하여 고구려의 족원을 한국사와 단절시키고 처음부터 화하족(華夏族) 문화를 계승한 존재로 설정하고 건국 이전부터 고구려 선인과 중원왕조의 관계를 신속(臣屬)과 복종(服從)관계로 설정했다.


이로써 고구려가 중국 경내에서 건립되었다는 견해를 더욱 강하게 주장하고 건국 직후 한(漢)에 귀속하였고 시종일관 현토군의 통제를 받으며 예속관계를 유지하였고 최근에는 한(漢)이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요동뿐 아니라 북한지역까지 관할한 사실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왕들이 한대(漢代)이래 중원왕조에 공물을 바치고 인질을 보내며 스스로 중원왕조의 변방 지방정권으로 자처하였고 민족단결을 위해 복무한다는 대명제 아래 고구려와 중원왕조는 기본적으로 화평(和平)관계를 유지하였다고 설정했다. 이를 위해 유리왕을 사례로 들면서 고구려왕은 한인(漢人) 여자를, 요동의 관리는 고구려 여자를 아내로 삼는 습속이 유리왕대부터 멸망 시까지 유지되었다고 논거 없는 주장을 한다. 또한 전시(戰時) 이외의 기간, 고구려는 후한과 10여년, 수(隋)와 5년, 당(唐)과 12년만 전쟁을 했을뿐 그 외는 화평관계라고 한다. 그런데 427년 평양천도로 고구려 중심지가 한반도로 이동함에 따라 현재의 중국영토를 소급시켜 고구려와 중원왕조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에 중대한 결함이 발생되었다. 이에 평양천도 이후에도 중원왕조와의 예속관계에는 변화가 없다면서 고구려의 세력 확대로 관할범위가 확장되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래도 평양이 중국영토 바깥에 위치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자 고조선 시기의 국경선인 패수(浿水)를 대동강으로 비정하여 고구려 중심지가 중국 국경선을 넘지 않았다면서 현재의 한중(中朝) 국경선은 고구려 이후 역사변화의 결과라고 강변한다. 또한 졸본(卒本)(환인), 국내성(집안)뿐 아니라 평양일대까지 한사군(漢四郡)의 범위에 속한다면서 중국 동북지방의 변방민족정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본래 중국영토’라는 607년 수(隋) 배구(裵矩)의 말을 근거로 수?당은 고구려 지배세력의 잔혹한 수탈과 침략 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출정한 것이므로 침략전쟁이 아니라 변강 소수민족 할거세력을 통제하던 과정이라 한다.


고구려 멸망 직후 고구려족은 한족의 대양(大洋)에 흩어져 살았음 한인(漢人) 8종의 하나로 파악. 고려와 고구려의 건국 시기에 큰 차이로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건국 지역이 다르고 주민도 신라인과 백제인이 중심이고 고구려인은 소수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바탕으로 국호(國號)를 ‘고려’로 정했고 이후 북진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으며 중국인들도《송사(宋史)》이래 고려가 고구려 계승국임을 명시했다. 물론 고구려 멸망 후 중국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은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 지역에 흡수되었으나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는 통일신라나 발해를 거쳐 우리 민족문화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현재 중국학계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으로 고구려사를 중국 내부의 민족관계로 설정하기 위해 기존사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일방적인 주장을 열거하고 있다. 이는 ‘고위금용(古爲今用)’이라는 현재적 목적을 위해 주변국의 입장은 도외시하고 중국대륙 왕조의 입장만 강변하는, 과거의 역사를 현재를 위해 자의적으로 재해석하는 또 다른 역사왜곡이다
2012-04-16 13: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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