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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0회 국민강좌] 우리미술사에서의 고구려 벽화 - 국학원
icon 당산대형
icon 2012-04-16 13:14:12  |  icon 조회: 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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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0회 국민강좌] 우리미술사에서의 고구려 벽화 - 국학원

[20회 국민강좌] 우리미술사에서의 고구려 벽화(다시 보는 고구려벽화)
이종상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천도 한지 올해 2000년을 맞는다. 긴 세월이 흐른 지금 그 곳은 중국 땅이며 오랫동안 간직한 역사마저 중국에게 빼앗기려는 수난을 겪고 있다.

사람들은 나라를 지키는 것은 군인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영토는 군인들이 지키지만 국방개념에 우리문화가 포함되지 않으면 땅뺏기놀음일 수밖에 없다. 강대국이 다른 나라를 점령해서 제일먼저 하는 일은 그 문화를 점령하는 것이다. 나라는 문화인들이 지킬 수 있고 예술인들이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해 무용총, 각저총 등 일만 여기의 무덤 속에는 당시의 고구려 문화요 예술이 살아 있다. 중국은 지금 그 우리 문화를 송두리째 자기네 것으로 하려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미술품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리는 액면화(額面畵)가 대부분이지만 고구려 벽화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땅 속 그림으로 사후에도 삶의 영속성을 간직하기위해서 현생과 같은 모습을 재현해 놓은 정신생활의 터전이다.

벽화내부의 그림은 부부의 현실생활을 중심으로 집안 식구나 하인 등 인물과 행렬, 기마(騎馬), 무악(舞樂), 수렵, 마사(馬舍), 차고(車庫) 등 생전의 일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건축양식 그대로의 기둥과 들보의 그림과 배열된 도구로 입체감까지 느껴진다. 고대 벽화를 그린 사람들은 장소와 환경에 맞는 재료를 선별하는 일부터 토목이나 건축, 설계, 축대, 디자인, 채색, 화공, 연금술 등 각 분야마다 전문적인 재능을 갖춘 만능 예술가였다. 고구려벽화표면이 누수로 온통 물에 젖어 있지만 천년의 세월을 지나도록 한결같이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중국 돈황 벽화가 적당한 습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사막 밑에 굴을 뚫고 잔자갈과 토사로 습기를 유지토록 만든 화장지 위에 그림을 그린 건식기법이라면 고구려의 벽화는 소석회에 해초를 섞어 바르고 참숯불을 피워 습도가 증발하기 전에 겉만 살짝 굳혀 그림을 그렸다. 삼투압에 의해 물감이 벽면에 저절로 스며드는 부온습식기법이다. 이 기법은 시간이 지날수록 겉면에 저절로 막이 형성되어 윤이 나고 색도 선명하다.

탄산수에 녹지 않는 접착제를 만든 지혜가 아닐까한다. 동양에서는 접착제로 일찍부터 쇠뼈로 만든 아교나 민어풀과 해초, 녹교 등을 사용하였다. 단순한 접착제가 후대 미술문화는 물론이고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체를 빼고는 전부 접착제의 창작품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인 고려의 직지심체요절의 인쇄가 가능했던 것도 바로 우수한 접착제의 활용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또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려불화의 우수한 예술성과 재료기법도 고구려벽화로부터 물려받은 아교나 녹교 같은 접착제로 가능했다.

물감으로는 그을음(카본)이나 송연 먹, 또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궤테석이나 갈철석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태워서 검붉은 진갈색으로 윤곽선이나 기둥, 나무줄기 등에 바르는 천연의 재료를 사용하였다. 영구보존방법을 연구해서 지방풍토에 맞춰 천연의 황동광이 나오는 지역에서는 녹청색 색소를 쓰고 적철광이 흔한 곳에서는 황갈색 또는 적갈색 색소를 사용한 것이다. 엄청난 양과 수준의 고구려예술을 우리는 아득히 먼 태고의 신화처럼 알뿐 현대 미술과는 단절되었다고 알고 있다.

고구려와의 연계성을 확인하고 한국회화사를 다시 쓰고자 세계 여러 벽화를 찾아 다녔다. 쌍영총의 고분벽화 기법을 응용한 장지기법으로 대형 기록화를 남기고 광개토대왕의 표준영정을 그렸으며 호태왕이 요하를 넘어 북진하는 전쟁기록화도 제작하면서 고구려벽화기법이 고려 불화와 조선의 인물초상과 민화기법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실물을 접하지 못해 풀지 못했다가 벽화연구차 평양을 방문하여 강서대묘를 본 순간 많은 의문이 풀렸다.

평양 강서대묘의 조벽지벽화는 돌 위에 바로 그리는 기법이다. 숯을 태워 충분한 습기가 유지된 상태에서 조각 후에 색을 끼워 넣기 때문에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다, 습도에도 빙동현상이라 하여 그 색상이 투명하게 유지되나 건조해서 벽면이 탈수되면 채도가 떨어지며 변색과 함께 들뜰 수도 있으므로 유적지의 보존이 매우 중요하다. 벽채와 천장을 축조한 기법에서 고급 판석이나 장대석으로 부와 권력욕을 노출시키고자 한 뜻은 지금까지도 전통적인 한옥의 대청마루에 노출시킨 대들보와 석가래의 건축양식으로 발전하여 우리나라 건축의 조형미로 승화시켰다. 벽화의 내용도 사후에 살 미래세계로 고구려인의 영혼불멸사상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민속신앙이며 유·불·도의 혼합된 홍익인간사상이다. 서양에선 그림과 화가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화가가 역적질을 하더라도 그의 예술적 가치는 떨어지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다르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이 있고 제일의 예술작품이 있더라도 작가가 역적질을 했다면 그 날로 그 예술품은 불쏘시개가 되어 버리는 것은 바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홍익사상 때문인 것이다.

408년에 그려진 강서 덕흥리 벽화에서는 식물성 수지인 콩댐기법의 증후를 목격했으나 아직은 분명치 않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종이에 그려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회화기법은 물론 우리의 장판문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향을 미쳤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벽화의 재료와 기법 안에는 회화의 모든 원리가 들어있는 예술의 뿌리이므로 모든 회화기법은 고구려 벽화로 귀착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옛 조상들이 아무리 훌륭한 문화를 향유하고 유산으로 남겼다 하더라도 그 후예들이 창작하고 전승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한심스럽고 슬픈 일이다. 막중한 소임을 맡고 있는 화가들이지만 역사교육에서부터 기회를 잃었고 현장으로부터도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만 드나드는 현실에, 소외되어 온지 오래되었다.

1982년도의 일이다. 일본에서 고구려벽화와 아주 유사한 아스카벽화가 발견되었다. 고구려벽화의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작은 아스카 벽화를 규모는 말하지 않은 채 “우리도 벽화가 있다”면서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다. 화가로서 참여한 본인 이외에 전문가 출입 이후 일본은 옆에 모사도만 설치하고 벽화는 보존하기위해 완전히 밀봉했다. 이때 일본에선 야마도의 개인미술관인 한 작은 대화문화관에서 고려 불화를 320여점이나 전시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박물관인 호암 갤러리나 국립 박물관에도 소장하지 못한,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는 고려불화를 우리나라엔 한 점도 소장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나라 화가들이 당당한 것은 그 문화가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관심하게 역사를 방치하고 있는 동안 내 문화와 역사를 빼앗기고 영토를 잃는다는 것은 곧 영혼을 빼앗기고 육신마저 잃는 것과 같다. 인류의 문화유산인 고대 고구려벽화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틀림없다. 우리의 문화가 고구려로부터 이어온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고 단절된 미술사라는 인식은 문헌고증으로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벽화의 착색법이 고려불화로 사찰에서 이어지고 불화가 유가로 들어서면서 양반가의 인물기법으로 전해졌음을 문헌고증으로 증명해서 족보가 있는 우리나라 미술역사를 정리해야한다. 중국에 있고 일본에 있는 유물유적을 우리 것이라고 하기이전에 우리 속에서 잉태되어 창작된 우리문화로 승화시켜야 한다.

불교시대를 거쳐 유학이 덮치고 일본이 삭제해버린 역사에서 6.25를 체험하며 채색문화는 수묵화가 일색이었듯 시대에 따라 기법도 소재도 다르게 변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실정이었다. 서양문화가 밀려오고 5공 시대, 6공시대로 정치이념과 사회이념도 다르게 변하기는 매일반이다. 역사가는 그 시대상황과 소재와 기법을 고려하지 않고는 제대로 승계됨을 연결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지만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항상 미래를 생각하자. 전 세계에 없는 것을 창작했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예술의 뿌리에는 역사가 보인다. 전생의 과거를 보고 싶다면 현대 미술관으로 가고 농축된 지혜와 슬기의 보고(寶庫)인 박물관에서 미래를 설계하라. 가장 집단적이고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국제적 시각을 갖고 우리 것이라고 하기 이전에 우리 속에서 잉태되고 창작된 미래를 보여야 한다.
2012-04-16 13: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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