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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1회 국민강좌] 민족사관과 식민사관 - 국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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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12-04-17 16:31:20  |  icon 조회: 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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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1회 국민강좌] 민족사관과 식민사관 - 국학원

[21회 국민강좌] 민족사관과 식민사관
신용하 | 한양대 석좌교수




일제는 3.1운동 후 비약적으로 높아가는 조선민족독립운동을 잠재우기 위하여 <朝鮮半島史조선반도사>를 편찬하기로 계획했다. 어용 학술단체 朝鮮史學會(조선사학회)를 조직하고 '朝鮮史編修會(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주의사관으로 저술한 <朝鮮史>37권의 사서를 만들었다. 누구를 위한 사서였나?

일제의 조선사편수회는 1932년부터 1936까지 <조선사>37권 <조선사의 길잡이>, <朝鮮史料集眞조선사사료잡진>3권, <朝鮮史料叢刊조선사료업간>21종을 간행했다. 그 중 37권의 조선사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가장 역점을 두어 편찬한 사서로 식민지정책에 유리한 것만 선택하여 부풀리고 불리한 것은 모두 빼 버렸다. 일제 조선총독부의 식민지통치 25주년을 기념하는 대중용 해설서 <조선사의 길잡이> 에는 한국민족은 고대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언제나 타율적(他律的) 사대적(事大的) 역사를 가졌으며 일제 통치 하에 처음으로 행복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했다. 한국민족사의 기원이 주변국의 식민지(콜로니)로 시작되었다고 날조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설, 위만조선(衛滿朝鮮)설, 한(漢)의 식민지인 한사군(漢四郡)설로 단군조선은 황당무계한 신화에 불과함을 강조 하고 사대주의로 독창성이 없는 모방민족이며 당쟁만 일삼은 민족이라 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를 병탄하기 50여 년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하고 쳐들어온 침략국이다. 1854년 요코하마 항에서 미국함정의 함포사격 2발로 일본은 불평등조약인 화친조약을 맺었다. 1년간의 무역수지결과 자국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요시다쇼인’이란 사무라이가 2년간 고심 끝에 묘안 책을 떠올렸다. 그가 고안해낸 묘책은 성주를 중심으로 살아 온 지방분권체계를 타도하고 일본국민들의 구심점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천황제(중앙집권근대국가)를 설립하는 것과 조선을 정복해서(정한론) 그곳의 금, 은, 산물을 가져다 막대하게 누적된 적자를 해소하는 안이었다. 정한론의 구체적인 첫 단계로는 조선정복으로 자국의 적자를 메우고 다음단계의 만주정벌에서 이익을 창출하고 마지막 단계로 대만과 여송도(필리핀)까지 정벌해서 대일본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래야만 서구의 열강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을 확신하고 일본장래를 위해 교육의 장을 만들었다.

요시다쇼인은 1856년 쇼오까천숙(마쓰시다천숙, 송하천숙)이란 학교(우리나라의 서당수준)를 만들어 어린 사무라이들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교육시작 2년 만에 요시다쇼인은 당시 장군후계자 지명 시 천황제의 본색이 탄로나 사형되었다. 애국심에서 일본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구심점을 천황제로 고안한 것뿐이었지만 정치권력자의 눈에는 그의 사고가 정계를 뒤집는 획기적인 반동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학교가 없어지고 스승이 사형으로 죽자 제자들 중 이와꾸라도무미는 가장 나이어린 17세의 이등박문을 시켜 은밀하게 스승의 시신을 매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은 스승의 정한론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피의 서약을 하고 뿔뿔이 흩어져 전 일본 각처에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10년 후, 1868년 1월 이와꾸라도무미 외 쇼인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명치천황을 내세워 왕정을 복고시켰다. 근대일본의 신정권, 명치유신인 것이다. 바로 다음해인 1869년 기또 다카요시가 각료로 취임하자 ‘정한론’을 통과시켜 정한론은 당당하게 국책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예방하거나 문서를 보내기 위해서는 대마도주의 인장이 필요했었다. 그럼에도 인장을 찍기는커녕 오만불손한 내용을 보내 침략의 빌미를 만들었다. 그러나 병인양요를 해결하고 일본서류를 받지 않는 등 서릿발 같은 대원군의 위세에 꺾여 돌아갔다.

그들은 대일본제국건설을 위해 1년 10개월간 서양강국들의 정세를 시찰하고는 한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나라의 국력을 키우는 게 중요함을 깨닫고 선내치후정한(先內治後征韓)으로 바꿨다. 국력이 약하면 애써 한국을 정복하더라도 강대국에게 빼앗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명분이 분명한 정한을 하기위해 철저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1882년 3월 일본 육군참모 본부에 조선국사 편찬부를 만들고 젊은 장교들에게 조선말과 조선 국사를 가리켜 조선에서 자료 수집을 하였다 그리고 정한목적에 편리하도록 ‘어떻게 조선역사를 꾸밀 것인가?’에 대해 연구, 토론과 자료 분석을 했다.

1883년 이등박문이 내각총리가 되어 일본제국대학(동경)을 설립하고 1887년 제국대 내에 사학과를 설치하여 육군부대에서 그동안의 활동 결과물과 자료, 조사결과 등을 이관시켰다. 당시 서양에선 실증주의에 의한 역시를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은 세계적인 명분을 세우려고 불란서에 실증주의 철학자 루드비히제자 리스를 초청하여 과학적인 역사기록방법을 배웠다, 2년간 같이 일을 한 리스는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을 눈치 채고 이의를 제기하자 겉으로는 곱게 순순히 응하고 사학과가 있음에도 국사학과를 신설하여 그동안의 결과물을 모두 이관시켰다.

드디어 일본은 1892년 신진제국일본의 젊은 교수 임태보(하야시)에 의해 조선사 5권과 만선사(만주조선)를 만들었다. 그 어느 고서에도 없는, 황당무계한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설과 임나일본부설이 이때 만들어졌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신라 외에 고구려, 백제, 가야까지도 모두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를 채택하여 일본이 조선을 치는 것은 일본의 구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조선은 일본의 고대말이나 10세기 등원(藤原)시대처럼 낙후하여 스스로 발전할 능력도 없고 가난하고 불쌍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제해야 한다고 전 국민에게 교육시켰다.

일본의 이러한 역사날조를 제일 먼저 포착한 사람이 신채호이다. 그는 1908년부터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 대한매일신문에 ‘독사신론(독사신론)’연재하고 1910년 병탄 이후 1915년 백암 박은식이 한국‘통사(통사)’를 발간하여 국민들에게 역사를 알렸다. 그러자 일제는 1916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설립하고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 편집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에 있던 역사서들은 모두 수거되고 조성왕조실록이 있던 규장각에는 우리나라 사람은 그 누구도 열람하지 못했다. 오로지 일제가 만든 조선사 37권만을 인용하도록 했다.

조선사 사업개요에 조선사를 편찬하는 목적이 6페이지에 있다. 간단히 거론하면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의 야만인과는 다르다. 고대로 내려오는 역사서의 존재가 많고 새로이 제작한 책도 많다. 전해오는 사서에는 현대와 관련하여 옛 꿈을 추상하여 독립정신을 키우는 폐단이 있다. 몰수하고 강압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 오히려 사료를 겸하여 공명적확한(植民主義史觀)역사책을 만들고 배포하여 한국병탄을 은혜로 알게 하는 것이 조선반도사를 편찬하는 이유라 했다. 그래서 조선민족을 영구히 소멸시켜서 일본의 천민층(賤民層)으로 편입시키려고 조선민은 원래 일본민족과 조상이 동일했다거나 일본민족의 한 지류(支流)라고 하며 '일선동조론(日鮮同組論)'을 주장했다.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이 우리역사의 어두운 면과 열악한 면, 추악한 면, 부끄러운 면을 과장하거나 날조하여 부각시켰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면이나 승리한 면, 창조적인 면은 모두 부정하여 사실과 다르게 왜곡했다. 이렇게 한 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고 조선민족의 독립사상을 근원에서 소멸시켜 버리려고 획책한 것이다. 이 왜곡된 역사는 각 학교와 교육기관은 물론, 각종 매체를 통해 조직적으로 교육되었다. 그 독(毒)은 실로 막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학교 교육에 역사학의 이름으로 주입되었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여 세대가 바뀌어 자각하지 못하고 고착화 되었다. 그 때의 왜곡된 역사를 3대가 바뀐 지금까지 배워 왔으니 그 피해는 말과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과거의 생활과 사건들은 진실이지만 누가 어떤 사고로 보느냐에 따라 역사는 바뀐다. 우리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고 왜나라 민족이 아니라 한민족이다. 식민지국에서 벗어 난지 이미 오래다. 이제라도 일본에 의해 잃어버린 우리의 바른 역사를 바라보는 민족사관으로 역사를 밝혀야 된다. 일부에서 정체성을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2012-04-17 16: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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