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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2회 국민강좌] 民族主義史學의 양대 산맥, 신채호와 박은식 - 국학원
icon 당산대형
icon 2012-04-17 16:32:43  |  icon 조회: 3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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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2회 국민강좌] 民族主義史學의 양대 산맥, 신채호와 박은식 - 국학원

[22회 국민강좌] 民族主義史學의 양대 산맥, 신채호와 박은식
-신채호와 박은식 民族史學의 발전적 계승을 위한 제언-
김 동 환 | 국학연구소연구위원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는, 우리의 역사를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근대화시킨 인물이다. 그들은 기존 유교중심의 전통적 사관으로부터 탈피하여 탈 중화(中華)적 민족사를 정리했음은 물론, 일제의 침략사관(식민사관)에 대항하여 자주적 민족사관을 확립했다. 특히 이들은 유교의 실증적인 면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도가(道家: 神敎 ,仙敎, 仙道)의 자주사상을 토대로 정신과 문화를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근대사학의 방법론으로 민족사학의 지평을 개척했다. 백암의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단재의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이 그 가치의 완성체이다.


백암은 전통유교기와 개량유교기, 그리고 대종교 영향기를 거치면서 그의 민족주의사학을 성숙시킨다. 역사의식의 관점에서 볼 때, 전통유교기와 개량유교기에 보여 주었던 백암의 가치는 공자의 춘추사관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시기 백암의 역사인식 또한 ‘단군-기자’를 함께 엮어 이해하려는 중화사관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토대로 자리잡은 정신은, ‘공부자의 도(유교)’임을 확신했던 백암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 그가 보여 준 유교구신운동이나 양명학운동, 그리고 대동교(大同敎) 창건 등의 활동은 고루한 유학자 또는 개혁유학자의 정신으로 행동화되는 것이다.

백암이 그의 역사정신의 핵인 국혼(國魂)을 찾게 되는 계기는, 고신교(古神敎)의 부활인 대종교를 경험하면서다. 이 시기에 와서 박은식은, 앞서 드러냈던 중화주의적 가치에 대한 단절을 선언하고 천여 년을 이어 온 중화노예로서의 역사를 회개. 통곡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당대의 유생들을 세상을 기만하는 도둑으로 매도하고 공자를 화인(華人)으로 단정하면서 공자의 가르침에 앞서는 것이 나라를 세우는 의리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일찍이 <독사신론(1908)>이라는 글을 통하여 ‘단군-부여-고구려-발해’라는 대륙적 역사인식에 눈을 돌린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그의 정신 역시 유교의 가치 긍정 위에서 한국 고대 선교에 대해 불로장수를 추구하는 중국종교의 아류 정도로 인식할 뿐이었다. 그가 선도(仙道)의 발현이라 할 수 있는 ‘낭가사상’에 눈을 뜨게 된 계기도 단군신앙의 경험과 연결된다.
즉 단재는 대종교를 경험한 후인 1910년 <동국고대선교고>를 통하여, 유교정신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고유사상을 토대로 한 역사의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이 글에서 선교신앙(仙敎信仰)의 주체를 삼신(三神)으로 보았고 단군이 세운 오계(五戒)가 흘러 화랑의 오계로 통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가 발호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중국화하려던 시기에도 조선을 조선답게 지켜온 자, 화랑”이라고 내세웠던 것이다.

단재의 역사정신을 가늠할 또 하나의 문적이 <꿈하늘(1916)>이다. 이 글은 사담체 소설형식으로, 단군을 중심으로 한 신채호의 대륙사관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꿈하늘>은 박은식의 <몽배금태조(191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 체제와 형식 그리고 바탕정신이 동일하다. 즉 유교적 중화주의에 대한 철저한 공박을 통해 신교(神敎)의 중흥을 통한 자주적 사관의 확립을 구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까닭에 <꿈하늘>에서는 단군 이래 흘러온 종교적 상무정신과 민족사의 흥망을 연결시키면서, 정신사관과 문화사관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이것은 상무정신을 토대로 민족적 자주사관을 확립하려는 단재의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단재의 문화사관과 정신사관의 틀인 낭가사상의 배반(胚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후일 발표되는 <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1925)>이라는 단재의 논문으로 통하게 된다.

단재의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은 과거 일천 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정치?종교?예술?문화 등의 모든 면에 중국의 노예가 되어버린 일대사건을 ‘묘청혁명(1135)의 실패’에서 발견코자 한 글이다. 단재는 이 글에서 묘청 등의 서경천도파를 민족주의(낭가사상으로 무장된 자주파)로 보고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토벌파를 사대주의(유교사상으로 무장된 비자주파)로 간주했다. 또한 단재는 묘청의 경거망동으로 실패한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역사에서 유교적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었으며 유교적 사대주의에 입각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유일한 삼국사로 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백암과 단재의 ‘국혼’과 ‘낭가사상’의 배경에는, 신교(神敎)라는 단군신앙의 틀이 굳게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을 토대로 그들의 민족주의사학이 자리잡았던 것이다. 한편 이들은 이러한 역사관을 토대로 전통적 사관(유교사관)을 극복코자 했으며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항했다. 또한 이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월성과 정신적 고유성을 강조하는 역사의식과 맞물려 조국광복운동에 고귀한 에너지가 되었으며, 후일 안재홍, 손진태, 이인영 등에서 꽃피우는 신민족주의사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 충돌하고 있다. 내적으로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부터 다종교사회에서 오는 불협화음, 나아가서는 반세기를 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이념의 대립 등이 대표적이다. 외적으로도 경제, 문화, 교육 등의 개방 현실화와 국제적 생존 조건으로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지역공동체의 구체화, 신패권주의와 자원민족주의의 대두 등이 그것이다. 더욱이 역사인식의 방면에서(물론 서양사를 전공한 일부 학자들이긴 하지만) 민족이나 민족사 무용론이 대두되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또다시 역사인식과 연관하여 민족이라는 문제를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민족사회의 혼돈과 세계화의 탁류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첩경인 동시에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백암과 단재는 광복의 조국 하늘을 보지 못했다. 백암은 1925년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단재는 그로부터 17년 뒤인 1942년 영양실조로 유명을 달리했다. 해방 후 조국은 그들에게 각기 ‘대한민국건국훈
대통령장’과 ‘건국공로훈장복장’을 추서하여 예우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받고자 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가 치열하게 싸우며 일구고자 했던 민족사학의 열매가 아닐까. 역사인식 또한 시대적 가치와 더불어 반복될 수 있다. 일제하 민족주의로 대표되는 백암과 단재 사학의 의미를 이 시대의 가치와 연결시켜 재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민족생존의 문제에 있어 그 절박성이 이 시대에도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화합의 상징적 조건의 도출과 분단의 극복을 위한 민족정체성 확인의 문제, 그리고 동북아시대와 세계화의 위기를 헤쳐 나아갈 정신. 문화적 역사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현금 우리 사학계에 비춰지고 있는 백암과 단재의 역사적 위상은, 강단사학자들이 바라보는 단군사화의 안목과 다를 바가 아니다. 형식적으로는 예우하는 듯하면서 내용적으로는 배타시하는 미묘한 안목이 그것이다. 근대 역사학적 방법론의 시도와 민족주의 역사학을 개척했다는 형식적인 예우를 전제로,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사료검증의 결여, 영웅주의사관, 국수주의사관, 시대 낙후적인 저항사관이라는 멍에를 씌워 역사의 이방인으로 철저하게 소외시키고 있다. 한 마디로 백암과 단재의 사학정신은, 가치가 전도(顚倒)된 한국사의 뒷면에 폐기처분된 상태다.

이제 우리 사회는 변화된 시각이 요구된다. 자폐적이고 자조적으로 바라보던 민족에 대한 애정이 그것이다. 분단이라는 두 국가 두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이 민족이다. 또한 다국적 다인종 사회에서 상생을 위한 기준도 민족이다. 더욱이 국경과 문호가 개방된 국제화시대에 민족과 민족문화의 소중함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민족적 입장에서 역사를 인식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찍이 백암과 단재가 개척한 민족주의사관에 대한 창조적 계승의 중요성도 이것과 접맥된다. 박은식과 신채호의 민족사관에서는 민족의 가치혼돈을 지양할 수 있는 정신사관의 틀을 볼 수 있고 분단의 비극으로부터 하나가 될 수 있는 민족적 통일사관의 논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북아시대와 국제화시대에 민족을 토대로 성장해 갈 수 있는 문화사관의 구도가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2012-04-17 16: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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