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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3회 국민강좌] 百濟는 어떤 나라인가? - 국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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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12-04-18 13:55:42  |  icon 조회: 3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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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3회 국민강좌] 百濟는 어떤 나라인가? - 국학원

[23회 국민강좌] 百濟는 어떤 나라인가?
이도학 |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우리는 백제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또한 알려고 겸허하게 노력은 했는가?
『삼국사기』백제본기 맨 끝 구절에 “그 땅은 이미 신라와 발해, 말갈이 나눈바 드디어 國系가 끊어졌다”는 기사가 있다. 백제 땅이 신라 영역이 된 것은 이해되지만 발해와 말갈까지도 그 일부를 점유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백제를 건국한 사람이 누구이고 그 조상이 누구인지 알아야 흩어진 조각기록이나마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건국시조(始祖)는 온조이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자의 이름은 넷이나 되고 1145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도 백제시조를 고구려 주몽왕의 아들 온조(溫祚)와 북부여왕인 우태(優台)의 아들 비류(沸流)를 함께 기재하고 있다. 김부식은 당시 두 개의 백제시조설이 전승되어 왔음을 알고 있었고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편의상 큰 글씨로 기재한 고구려계의 온조 만을 백제시조로 알고 있을 뿐 북부여왕 태우의 아들 비류는 잘 모른다.

온조 건국설화가 타당하려면 백제 왕실의 성씨는 고구려 왕실과 동일한 고씨(高氏)여야 한다. 그러나 백제 왕성(王姓)은 온조계와 비류계가 모두 부여씨(扶餘氏)였다. 부여씨는 동아시아의 노대국(老大國)인 부여국 왕의 성씨이므로 백제 왕실의 족원(族源)이 부여임을 뜻한다. 『삼국사기』에도 “시조 東明王廟에 배알하였다(다루왕 2년조)”와 ‘시조 동명(제사지)’이라고 기록한 동명왕은 고구려 시조인 주몽이 아니라 부여의 건국 시조를 말한다. 472년에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외교문서(國書)에도 “우리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라고 하여 백제의 계통이 부여임을 밝히고 있다. 중국 『한원』에도 백제시조는 구태(부여계통)로, 일본문헌인『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도 백제시조가 도모데왕(都慕大王, 동명왕- 하늘의 강령을 받아 부여 땅을 차지한 왕)으로 기록되었다. 이 모두가 부여계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백제라는 말은 984년에 송나라 황제가 고려 성종에게 내린 조서 가운데 “항상 백제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영원히 長·淮(양자강과 회수)의 족속을 무성하게 하라”라는 구절에, 백제가 강성했을 때 중국의 吳越 지역을 공략했다고 한 최치원의 글에, 『원사』에서 1267년에 백제의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한 양호가 비단을 하사받은 기사에도 나온다. 외교사절이 직접 찾아왔기에 남겨진 기록인지라 백제의 존재를 쉽게 부인하기 어렵다.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백제는 본래 만주에 있다가 1차 분파로 4세기 중반 경에 남하하여 서울지역 세력을 통합하여 왕실교체를 단행했다는 설이 맞는다고 봐야 한다. <자치통감>이나 <진서> 와 <송서>에 ‘백제’라 언급된 근거와 5세기 중반 백제 조정에 등장하는 유목국가직제(職制)인 좌·우현왕제,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는 王號가 정복국가의 등장임을 뜻하고 현재 서울지역에 만주지역묘제인 적석총이 등장시기를 4세기 말로 간주하는 견해가 유력하기 때문이다. 538년에 사비성으로 천도한 백제는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명명하여 오늘날까지도 백제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의 이름 ‘부여’가 남아 있다.

백제사의 출발은 이제 고구려계가 아니라 부여계로 새롭게 인식되어야만 한다. 발해의 둘째 왕 대무임금도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고구려의 옛 땅을 찾고 부여의 전통을 유속했다’고 했다. 이로써 발해는 부여의 후예국으로 정통국가임을 천명한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고구려역사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해서 우리역사이지 한반도로 오지 않았으면 우리나라 역사가 아니었을 것이란 학자도 있다.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그런 가정이라면 부여는 한반도로 내려온 적이 없다. 영토는 분쟁으로 커졌다가 작아질 수도 있으나 그 나라 민족의 사상이나 문화를 전수받고 그 후예로서 이어감은 당연히 그 나라의 조상이고 역사이다. 부여사가 제대로 정리되고 평가되어야 백제와 고구려사가 정립될 수 있고 우리역사가 당당하게 자리매김 할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의 후예로써 한 뿌리이지만 입지적인 조건이 다르고 풍토가 달라 기질도 다르게 마련이다. 압록강중류와 동강유역에 국가를 건설한 고구려는 큰 산과 계곡으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배를 채울 수 없는 척박한 땅이다. 중국사서에 고구려인은 빠르게 걷고 성질이 흉악하고 노략질을 일삼는다고 했는데 환경에 따른 침략으로 고구려여인이 결혼준비물 중에 수의도 함께 하는 풍습이 있는 것을 보면 전투가 끊임없었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이와 달리 넓은 평야와 온난 다습한 기후로 항상 물자가 풍요로운 백제인은 온화한 기품과 느긋한 심성을 지녔다.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일찍부터 항만과 해상교통이 발달했고 빼어난 조선술과 바다를 잘 이용할 줄 알아 외부로 세력을 뻗쳤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절에는 强兵이 백만이나 되어...남쪽으로는 吳越을 침공하였고...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다”라는 신라 말기 최치원은 해상을 통한 백제의 중국 남부 진출을 언급하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大洋을 누볐던 백제자취가 중국의 최남부 지역인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에 소재한 지금의 ‘百濟縣(백제현)’이다. 백제군(百濟郡)이 설치된 곳이 되겠다. 晋平郡(진평군)은 그 자치구내의 창오현(蒼梧縣) 일대나 복건성의 복주(福州)로 새롭게 비정된다.『신당서』에서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越州 현 절강성 紹興市)라고 하였다. 또한 백제는 북규슈와 지금의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해협을 지나 필리핀군도(群島)까지 항로를 연장시켰다. 필리핀 군도는 흑치국(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이다.

1929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도굴꾼에 의해 장신의 유골 두 구와 묘지석(墓誌石)이 출토되었다. 중국사서에 나오는 9척 장신 흑치장군의 기록처럼 당시의 9척은 현 1m 96cm로 흑치장군과 그 아들로 판명되었다. 백제장군 黑齒常之 가문은 부여씨 왕족에서 나왔지만 ‘흑치’에 분봉(分封)되어 그 地名을 성 씨를 삼았다. 왕족을 지방에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의 일면이다. 인도지나 반도에까지 이른 백제는 부남국(扶南國지금의 캄보디아)과 북인도와 교역하여 그 지방의 모직물을 수입하여 왜(倭)에 선물하기까지 한 항해루트가 있었기에 성왕대의 승려 겸익(謙益)이 중인도에서 불경을 가져 올 수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있듯이 당시 동아시아의 모든 물산은 백제로 집중되어 백제 땅에는 공작과 앵무새, 악어는 물론이고 건조지대에 서식하는 낙타, 초원의 목축인 양 등 진귀한 동물들이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백제 영토 내에는 본토인을, 중국 지역은 그 실제 지배 여부와는 상관없이 중국인을 封함으로써 다민족 다국적의 열린사회로 백제조정에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起用되었다. 예로 성왕 때 동방령(東方令동방장관)에 왜 조정의 물부(物部)출신 마카무노 무라치가 임명되었고 나솔 관 등의 모노노베노 가히와 같은 많은 왜계(倭系)관료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하태수(西河太守)에 임명된 마야부(馮野夫)를 비롯하여 장군호(將軍號)를 지닌 왕무(王茂)와 장새(張塞) 그리고 진명(陳明)은 중국계로서 상당한 직책의 벼슬이 확인되고 있다.

고대국가는 왕실의 혈통을 하늘과 연결짓고 신비화시킨다. 권위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백제도 왕실의 族源을 온조나 비류를 뛰어넘어 부여의 시조인 東明王과 결부시켰다. 동명왕의 ‘東明’은 문자 그대로 태양이 솟아나는 ‘동쪽의 밝음’ 곧 光明을 가리킨다. 백제가 자국의 연원을 星座의 으뜸이자 중심인 태양에서 찾음은 백제가 세상의 중심에 자리 잡은 天孫國으로 그 자부심을 뜻한다. 그 상징적 표상이 世界樹 형상을 刀劍化한 七支刀이다. 세상의 중심, 宇宙木인 세계수는 그 가지가 사방 수천 리에 뻗친 왕권을 상징하는 聖具로 칠지도가 제작된 369년 겨울에 근초고왕이 전 장병에게 중앙을 의미하는 황색(黃色) 기채(旗幟)의 사열(査閱)을 받은 것은 황제로서 자신의 統治圈域을 알리는 자부심의 표상이었다. 6세기 초, 중국 양나라의「양직공도(梁職貢圖)」에 신라를 비롯하여 가야 나라들이 ‘百濟 곁의 小國’으로 열거되고(“有叛波·卓·多羅·前羅·新羅·止迷·麻連·上巳文·下枕羅等附之”) 「무녕왕릉매지권」에서 백제 국왕의 사망을 天子의 죽음에 쓰는 ‘崩’자를 사용하였음은 백제가 위성국을 군림하면서 號令하였던 황제의 국가로 새로 밝혀진 大國, 백제의 참 모습이 되겠다.

백제본기 맨 끝 구절과 『신·구당서』에 수록된 “그 땅은 이미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눈 바 드디어 國系가 끊어졌다”는 내용을『삼국유사』의 저자인 一然도 자못 의아한지 “이것을 보면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로 된 것이다”고 註를 달았다. 이는 백제영역을 한반도에만 국한시킨 발상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1593년 명나라 유황상과 원황이 조선 조정에 보낸 자문(咨文)에서 왜군을 격파한 내용을 “삼한백제가 이미 태평을 되찾았다”는 글귀를 상기해야 한다. 이 ‘삼한백제’는 조선의 대명사격으로 사용했는데 삼한백제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중원백제’를 의식하여 그와 동족의 후예국가인 조선을 ‘삼한백제’라고 한 것인지 저의는 알 수 없지만 저명한 역사가인 원황의 말인지라 의미를 곱씹게 한다. 백제멸망 이후 9세기와 10세기·13세기 그리고 16세기까지 포착되는 백제를 언제까지 떠돌게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겐 실증할 기록이 별로 없다. 그런 우리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라도 귀를 기우려야 한다.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며 , 백제의 계백장군 등 구전에는 당시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 당태종을 쏘아 물리친 장수이름을 몰라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패장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을지문덕과 양만춘 장군의 이름은 그 적군이었던 사람들에게서 알게 되었다. 적장임에도 오히려 존경하고 기리는 인물이 되어 몇 백 년 후에 임진란에 참전한 명나라군사가 알려 준 것이다. 인물평은 적에게 평가받는 것이 진정한 평가이다. 계백장군이 멸망한 적장임에도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져 옴은 자신만이 아닌 다함께 하는 철학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012-04-18 13:5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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