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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5회 국민강좌] 대제국 발해의 역사와 문화 - 국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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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12-04-19 09:52:29  |  icon 조회: 3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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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5회 국민강좌] 대제국 발해의 역사와 문화 - 국학원

[25회 국민강좌] 대제국 발해의 역사와 문화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1998년 정월, 장철수와 이용호 등 젊은 네 사람의 청년들이 ‘발해1300호’를 타고 뗏목 탐험을 하다 목숨을 잃었던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왜 그토록 소중한 자신들의 목숨까지 걸고 험난한 바닷길을 뗏목만을 고집하며 항해하려고 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늘의 특강이 갖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사 왜곡이 문제되고 있지만 중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발해사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여겼다. 발해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중국의 역사왜곡을 극복하려 했으나 오히려 고구려사의 중국사화(中國史化)로 고구려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견해를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배경에는 우리나라가 발해사를 소홀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발해국을 고구려인이 세운 왕조가 아니고 말갈(靺鞨)이 세운 국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한 유명 대학교수가 발해를 한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 희극’이라고 하는가 하면 대안 없이 ‘국사해체’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발해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30년 만에 결실을 맺어 대조영이 건국했다. 영토는 통일신라보다 4-5배나 컸고 고구려보다도 1.5배나 2배정도 커서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갖고 있던 왕조였다. 발해는 당과 군사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정치적 자주성을 확고히 지켜나가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행정기구명이나 시호(諡號)와 연호(年號)를 당의 입장에 개의치 않고 ‘사사로이’ 결정하고 있었다. 왕의 호칭도 ‘황상(皇上)’으로 황제를 자칭하고 있었다는 것이 여러 증거물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다. 다만 229년이란 짧은 지속기간으로 다른 왕조에 비해 단명했음이 아쉽다.

발해국에 대하여 우리는 고구려 계승국으로 우리역사의 일부로 알고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말갈국(靺鞨國)이라는 별개의 국가로 보고 일본은 고구려유민(高句麗遺民)과 말갈(靺鞨)이라는 두 가지 견해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 이라는 생각이다.

발해국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인들이 살던 지역을 중심으로 발해가 되었다는 상식적인 판단으로부터도 기인한다. 발해주민이 말갈이었다는 주장은 대조영이 ‘속말말갈’로 기록된 『신당서』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구당서』 이후의 기록자들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 만에 부흥한 발해국을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보지 않으려는 왕조중심적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고구려의 피지배인들을 고구려인과 다른 말갈족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발해 역시 비록 그들을 ‘말갈’ 부락이라고 불렀다고 하더라도 결코 고구려인과 다른 종족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말갈로 불리는 고구려말갈도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분·고묘를 통해 본 발해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석실분은 한계(漢系) 전실분(塼室墳)을 이어받고 말갈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하여 고구려의 고유성을 부정하고 있다. 중국이 석실분의 기원을 말갈의 토광묘(土壙墓=土坑竪穴封土墓)로 보려는 주장은 발해를 말갈계로 보려는 시각에서 나온 억측이다.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빈번한 외교는 고구려 문화에도 영향을 받기 쉽다. 특히 불교예술이나 벽화 등은 쉽게 전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구려나 발해문화를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 외래문화의 영향을 덜 받는 고분축조법이나 성곽 축성방법 등은 비교적 고구려의 고유성이 발해에 계승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왕과 귀족들이 쓸 수 있는 석실고분이 고구려와 발해문화의 비교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고구려인들이 모두 석실 무덤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구려와 발해의 서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장례법이 흙구덩이에 매장하는 토광묘였을 것이다. 유물이 없고 유적이 빈약하다고 해서 토광묘를 발해의 묘제로 보거나 고구려나 발해와 다른 말갈묘로 볼 수는 없다. 사료를 통해 볼 때 말갈은 고구려의 변방 주민들이었기 때문이고 서민들이 사용한 토광묘의 축조 방식은 오늘날의 매장 방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토광묘는 계획적인 발굴보다는 대형고분 발굴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다. 이는 고구려나 발해시대 것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인민중심의 역사를 한다는 북한의 고고학에서도 토광묘에 대한 관심은 소홀하다. 역사 복원을 위한 계획적 발굴보다는 유물 찾기나 보물찾기식의 발굴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발해연구는 미미하다. 발해사 연구에 있어 가장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원초적인 사료의 문제 이외에도 각 국이 처한 현대사적 이해관계로 인한 것이다. 발해지역에서 한국과 중국, 러시아가 각기 그들의 현대사를 이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발해사는 발해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점을 복원하려는 학문적인 문제를 떠나 종종 정치?외교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발해국의 자주성

종족적 입장에서 본 발해
한국인은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
고구려사보다 그 왜곡성이 심각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은 미지근하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하여 그토록 분노하고 있는 것은 발해사 왜곡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던 결과에 기인한다. 발해사에 대한 생각이 부족했던 것은 사료의 미비로 인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발해국을 말갈국으로 인식하려는 태도가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 중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고구려와 발해 왕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전과 문헌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 족보에 근거해서 횡성고씨(橫城高氏) 등은 장수왕 후손을 자처하고 있으며, 영순태씨(永順太氏)와 협계태씨(陜溪太氏)는 발해 대조영의 후손을 자처하고 있다. 한편, 한국인들은 고구려와 발해인들이 사용하던 온돌 등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세계에서 아파트에 온돌이 보편화된 나라가 한국이라는 점도 우리가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임을 자처할 수 있는 근거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전통문화 내지 풍속을 계승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것이다.

발해인들은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무덤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다만 석실분 등은 귀족문화의 계승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고, 피지배층의 문화는 대체로 토광묘로 보아야 할 것이다. 토광묘를 말갈인들의 전형적인 묘제로 보고 발해인들을 말갈인들로 보는 지배층중심의 역사관에 입각한 단견일 뿐이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은 이밖에도 벽화 미술과 음악, 성곽체제 등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만 미술과 음악은 유행을 타는 분야로서 선진적 당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벽화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석실분에 벽화를 넣은 전통은 고구려로부터 전수받은 것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성곽 축조 방식 역시 그 계승성을 엿볼 수 있는 분야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산성 중심이었다면, 발해는 평지성 중심이었다. 때문에 일정하게 그 방식이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 고구려 성곽 축조방식이 발해에도 일정하게 원용되었을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한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산성의 치 형식이 러시아의 발해유적인 크라스키노 평지성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한 예라고 하겠다.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화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어느 일부 명예욕에 불타 있었던 철없는 젊은이들의 무모한 항해로만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
2012-04-19 09: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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