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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6회 국민강좌] 한국사속의 儒敎史觀과 仙道 - 국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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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12-04-19 09:53:50  |  icon 조회: 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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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6회 국민강좌] 한국사속의 儒敎史觀과 仙道 - 국학원

[26회 국민강좌] 한국사속의 儒敎史觀과 仙道
정경희 |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교수



우리나라에 유교가 도입된 시기는 기원 전후이나 당시 유교가 미친 영향은 많지 않다. 삼국시대말까지의 시대이념은 선도였고 삼국시대 말기부터는 불교가 새로운 시대이념이었다. 이 때부터 기존의 선도는 불교와 합쳐지면서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 지배적인 이념은 겉면은 불교이고 실상은 선도인 선(仙)?불(佛)이 합쳐진 불교였다.

사회의 구조가 점점 복잡해지고 사람들이 더욱 이성적으로 사유하게 되자 지배층은 유교가 매우 효과적인 통치이념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정치의 사상과 제도적인 면에서 뛰어난 유교는 지배층의 문장학습의 방편, 외교적인 필요성 등에 의해 권장되면서 유교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졌다. 고려말기에는 당시까지 사회의 주류사상이던 선·불적인 흐름이 유교사상으로 전환하게 되는 과도기가 되었다.

조선으로 들어서면서 개창세력은 기존의 구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면서 새로운 시대 이념으로 성리학을 도입하였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단군을 민족 시조이자 선도 수행을 통해 성인(聖人)이 된 삼성(三聖=한인, 한웅, 단군)의 한 분으로 인식했다. 고려 말 몽고 간섭 기에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성리학이 보편화되고 한국유교의 창시자로서 기자의 위상이 극히 높아졌다. 동시에 한국선도의 聖人인 삼성의 위상이 하락하였다.

조선 건국 후 기자사당이 먼저 세워지고 역사의 중심이 단군에서 기자로 변화되었다. 단군사당이 세종 대에 이르러서 건립되긴 했으나 그 격은 기자사당보다 한결 낮았다. 이때부터 선도에 대한 이해가 사라지고 이단시되면서 단군은 단순히 민족시조일뿐 위상은 격하되었다. 또한 한인, 한웅, 단군의 삼성 숭배에서 단군만이 떨어져 나와 독자적으로 숭배대산이 되었다. 성리학이 국가의 공식적인 통치이념인 ‘국시(國是’가 되면서 성리학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한당유학의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보강한 성리학은 현상을 중시한 사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을 분리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러한 성향은 고려시대를 풍미하던 불교와 선도와 합쳐져 전승되어 오던 불교, 고려중기 이후 성행하던 중국 도교가 모두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이렇게 성리학 이념이 國是가 되면서 합리주의에 의한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경사체용론(經史體用論)에 입각한 유교적 도덕주의와 중국을 기준 삼는 中華主義(한국의 입장에서는 事大主義) 사상이 주가 되었다. 역사인식 면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전해오던 선도와 불교가 섞인 사상마저 밀려나게 되었다. 다만 성리학을 어느 정도의 깊이로 수용하느냐에 따라 조선시대 선도나 선도적 역사인식에 차이가 3부류로 드러났다. 성리학 이념에 철저한 의리론(義理論)에 입각한 역사인식으로 조선왕실의 공식 입장으로 선도나 선도를 부정적인 파,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의리론에 얽매이지 않고 공리(功利)에도 관심을 보인 실용주의적인 유학자들로 고대사를 영토 면에서 접근하는 파와 극히 소수지만 성리학을 사상의 하나로 인식한 자로 선도를 전통사상으로 이해하고 높이 평가하는 부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허목(許穆), 홍만종(洪萬宗), 이종휘(李種徽)가 있다.

공식적으로 성리학적 인식에서 관찬한 사서《동국통감東國通鑑》,《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나왔다. 이를 계기로 성리학은 보수적인 방식으로 변하며 도덕주의적 정통론을 담은 기자마한정통론(箕子馬韓正統論)을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성리학의 조선화가 진행되면서 성리학 틀 내에서 조선의 주체성을 찾아가려는 경향이 등장하고 영?정조대에 ‘조선중화주의’ 가 개념화되었다. 조선후기엔 당색을 막론한 관인유자들, 또 문헌고증학적 실증주의 계열의 학자, 이익, 안정복 등이 있는가하면 실용적 태도가 강화되면서 절충적 유학자도 늘어났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충적 유학자 허목은 신시배달국시대 이래 선도의 역사와 전통을 비교적 높이 평가하였고 홍만종은 기자마한정통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종휘는 문집《修山集》내에 〈神事志〉를 설정하여 선도의 역사와 특징을 전달하였다.

조정은 공식적으로 성리학 이념에 입각하여 선도를 이단시하고 선도와 관련된 제도와 풍습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통과 민속인 선도가 사람들의 체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탄압한다고 뿌리 뽑히는 것은 아니다. 왕실도 고려가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거국적인 공공의례(公共儀禮)로서 제천의례를 지내고 전국의 명산에서 산천신?성황신에 대한 제를 지내면서 국가 운영에 많은 효과를 거두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제도와 풍습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였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제천의례를 폐기하고 선도에 관한 기록들(古記類)을 수거하여 사상을 통제하고 선도식 의례를 음사(淫祀)로 단속했지만 실상은 선도를 유교 안에 끌어안는 양면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국무당(國巫堂)과 국사당(國師堂)을 제도화하고 각종 선도식 제례를 유교식 사전제(祀典制)안으로 포섭했으며 폐지하였던 삼성사(三聖祠)를 다시 복구하여 지속적으로 국가에서 관리하고 제를 지냈다.

민간에서의 선도 억제책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은 극히 저조하였다. 일반인들로서는 성리학 이념이나 성리학적 역사인식, 성리학적 예제 등이 생소하여 이를 적극 수용할 이유가 없었다. 고려시대까지 선도형식으로 이어진 풍습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를 억압하자 민간인들은 오히려 자율적으로 선도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음사로서 규정된 선도를 계승해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도가 민간에서 민간신앙적인 형태로 계승되면서 삼원론에 바탕한 심오한 사상이자 수련법으로서의 본질은 잊혀지고 기복적인 신앙의 형태로만 남게 되었다. 성황당이나 삼신각·칠성당·독성각 등에서 지내는 제나 향사, 강릉단오제, 동제의 의례, 또는 개인적으로 정화수를 떠놓고 하늘님이나 산신님께 치성을 드리는 방식, 민속으로서의 삼신단지나 부루단지 등에서 자신 속에서 삼진(三眞)을 찾는다는 선도의 본질은 까마득히 잊혀졌다.
2012-04-19 09: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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