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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9회 국민강좌]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3·1운동 - 국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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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12-04-23 16:22:25  |  icon 조회: 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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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9회 국민강좌]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3·1운동 - 국학원

[29회 국민강좌]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3·1운동
이동언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일제의 무자비한 식민통치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로 뭉쳐 항거한 독립운동이 바로 3?1운동이다. 2005년 을유년(乙酉年)은 한일국교 정상화 40주년, 광복 60주년, 을사늑약(乙巳勒約) 100주년 3?1운동 86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사람의 나이를 나타내는 말로 40세는 불혹(不惑), 60세를 이순(耳順)이라 한다. 광복은 회갑이고 3·1운동은 미수(米壽, 88세)를 앞두고 있다.

독립선언서에 우리는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 또한 헌법 전문에도 ‘3·1정신을 계승하자’라고 명시되어 있다. 86년 전 그날의 함성을 가슴에 새겨야 할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동시에 파고다공원에서 청년과 학생들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시위를 기점으로 4월말까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불길처럼 번진 만세시위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대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국외로까지 파급되어 3월 15일 전후로 만주에서 서간도, 북간도, 혼춘을 중심으로 수천 명 또는 1만 여명의 한국인들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미주지역에서도 미주·멕시코·하와이 재류 동포 전체대표회의를 개최하고 4월 14일~16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의 미국 독립기념관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처럼 3·1운동은 국내 방방곡곡은 물론이고 한국인이 사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에 앞서 2월 8일 일본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여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2·8독립선언은 사전에 국내의 지도층 인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3·1운동의 전주곡으로 추진된 학생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의 배경에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사상과 갑작스레 붕어한 광무황제의 독살설을 든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처음 밝힌 것은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인 1916년 5월 27일이었으며 민족자결주의 사상은 어느 당면한 구체적 정책이 아니라 세계질서의 기본적인 이념으로 제창된 것이다. 물론 당시 세계평화를 위한 새로운 사조가 널리 퍼져 나갔으므로 이것이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촉진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3?1운동이 전적으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의 갑작스런 붕어가 발단의 시작이었다. 당시에 알려진 일제의 광무황제 독살배경은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신빙서에 이완용(李完用)·윤덕영(尹德榮)·조중응(趙重應) 등이 각계 대표로 서명 날인한 서류에 광무황제가 이를 비준하고 옥새를 찍어야 된다. 그러나 광무황제는 대신들의 강청에도 완강히 거절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윤덕영·한상학(韓相鶴)이 두 궁녀를 시켜 광무황제께서 밤참으로 즐겨 드시는 식혜에 독약을 넣어 독살케 하고 두 궁녀마저도 남은 독약을 먹여 참살하였다. 이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입을 막은 것이다. 1월 22일 새벽 4시에 윤덕영·윤택영(尹宅榮) 등이 여러 귀족을 궁궐로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광무황제가 붕어한 것은 일제가 시해한 것이 아니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서명을 받으려다가 박영효(朴泳孝)·이재완(李載完)의 반박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또 민영기(閔泳綺)·홍긍섭(洪肯燮)은 의식위원으로 어체를 염습하다가 시신이 너무 빨리 문드러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광무황제의 붕어에 삼베옷을 입은 수십만 군중들은 대궐문 앞으로 몰려들어 짚으로 자리를 깔고 밤낮으로 통곡하였다. 상인들은 철시하고 학교도 문을 닫고 애도하였다. 광무황제의 갑작스런 붕어는 결국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의 항일 감정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한국을 강점한 후 9년간 자행해온 이 지구상에서 유례가 없는 잔혹한 식민지 무단통치와 한민족말살정책을 근본적으로 붕괴시키고 전 세계에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분명히 했고 만주·노령 등에서의 무장투쟁을 강화하고 촉진시켰다. 그리고 중국 상해에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입헌민주 공화제가 시작되는 민족사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민족보존을 위한 민족문화운동과 민족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이 되고, 농민운동·노동운동·형평운동·여성운동·소년운동 등 새로운 사회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제국주의의 식민지나 반식민지 상태에 있던 중국, 인도, 인도차이나, 필리핀, 이집트 등 약소민족에게 독립운동 대전환의 계기를 열어준 세계사적인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은 당시 인류의 4분의 3에 달했던 약소민족에게 자각과 용기를 일깨워준 횃불로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샤타야그라하 사브하(진리수호)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이전에는 독립의군부(1912), 대한광복회(1913), 대성학교 출신의 비밀결사(1914), 천도교구국단(1914), 조선국권회복단(1915), 선명단(1915), 한영서원의 학생비밀결사(1916), 자립단(1916), 조선국민회(1917), 이증연의 비밀결사(1918), 민단조합(1918), 자진회(1918) 등 국내의 많은 비밀결사단체들이 급속하게 분해 되는 위기상황이었다. 이때 3?1운동이 봉기하여 한민족을 회생시켰다. 그 이후 한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은 어떠한 힘으로도 파괴할 수 없도록 대폭 강화된 원동력을 구축하였다. 3·1운동이 가능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요인은 민족의 강렬한 애국적 전통과 독립에의 열망과 일제 무단통치에 대한 강렬한 저항과 더불어 기존의 사회조직(정기 장시(場市)과 학교조직을 잘 활용하였다. 거기다가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영향으로 자발적인 활동가가 양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간의 독립 시위 상황은 집회 수 1,542회(50인 이상의 집회), 참가 인원 2,023,098명(당시인구 1,700만 명), 사망 7,509명, 부상자수 15,961명, 피체자수 46,948명이고 교회당 47, 학교 2, 민가 715채가 불태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통계는 도시의 집회만 조사된 것이고, 지방에서의 소규모 시위와 1919년 5월 이후 간헐적으로 계속된 시위를 감안하면 실제 집회수와 참가자 수는 훨씬 많았다.

민족사학자요,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그의 저서『한국통사(韓國痛史)』(1916)에서 의병전쟁을 독립운동의 원류로 인식하였다. 선생은 이 전쟁으로 15만 명이 전사하였고 일제는 의병을 말살하기 위해 이 나라 3천리 강토에 쇳조각 하나 남지 않게 무기란 무기는 모조리 빼앗아 갔다고 폭로했다. 또한 그의 저서『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는 일제가 3?1운동을 구미열강의 힘에 의지하여 독립을 얻으려는 사대주의적 심산에서 나왔다고 왜곡한데 대해 반박한 글이다. 박은식 선생 또한 3·1운동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당하기 이전부터 시작된 의병전쟁의 연결이라고 주장했듯 3·1운동은 민족대표들이 독립만세 운동을 직접 지휘함이 없이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발전시킨 국민운동·민중운동·전 민족적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우리 민족사 뿐 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독립된 장으로 다루어야 할 정도로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운동임에 틀림없다.

당시 만주·노령지역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는 다음과 같다.

독립군단체명결성
연도활동중심지중심인물활동사항1태극단(太極團)1919장백현단장 : 조인관
정삼승,김동준단원은 2~3천명으로 국내진공전을 주로 전개함 2의군부(義軍府)1919연길현단장 : 이범윤
진학신한말 의병이 중심이 되어 조직,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 파괴3의민단(義民團)1919왕청현단장 : 방우룡
김종헌, 허근
홍림천주교도 중심이 되어 조직, 국내진공전에 주력4대한정의군정사
(大韓正義軍政司)1919안도현총재 : 이규
강희, 홍정찬
장남섭, 조동식3?1운동 직후 한말의병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대한정의단임시군정부(大韓正義團臨時軍政府)가 10월에 개편되어 조직된 단체 5조선국민의회
(朝鮮國民議會)1919연길현회장 : 김영학무장투쟁과 더불어 조선독립신문을 간행,
독립사상 고취에 주력6급진단(急進團)1919혼춘현노령의 독립군단과 연계, 무장투쟁 전개7한교공회
(韓僑公會)환인현손극장, 독고욱, 이천민일제침략기관 파괴와 친일파 척결8대한독립단
(大韓獨立團)1919유하현총재 : 박장호
조맹선, 백삼규만주 및 국내에 여러개의 지단을 두고 국내진공 유격전, 일제 주재소 등 파괴, 한말 의병이 주축이 되어 조직9대한청년단연합회
(大韓靑年團聯合會)1919안동현총재 : 안병찬
김승만, 김시점국내외 산재해 있는 청년단을 연합, 통일기구로 발족, 기관지 대한청년보 발간10대한독립군비단
(大韓獨立軍備團)1919장백현단장 : 이은향
이태걸국내진공전 전개, 여러 곳에 지단설치11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1919독판 : 이상용
여준, 김동삼
지청천임시정부 군정부역할, 신흥무관학교 설립 독립군 양성에 주력12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1919왕청현총재 : 서일
김좌진, 계화중광단, 정의단, 군정회, 북로군정서로 명칭개편, 서로군정서와 함께 임시정부 산하 군사기관으로 청산리전투 등에 참가13대한독립군
(大韓獨立軍)1919연길현사령관;홍범도
주달, 박경철봉오동전투 및 국내진공 유격전 전개14군무도독부
(軍務都督府)1919왕청현사령관;최진동
박영, 이춘승국내진공전에 주력, 봉오동전투 참가15국민회군
(國民會軍)1919연길현사령관;안무간도 대한국민회 소속부대, 봉오동전투 등에 참가16흥업단(興業團)1919무송현단장 : 김호
김혁, 윤세복각지에 지단설치, 병농겸행(兵農兼行)시책17광복단(光復團)1920안도현김성극, 홍두식각지에 지단설치, 국내진공전 전개18광한단(光韓團)1920관전현이시열, 현익철
현정경국내에 모험결사대 설치, 국내진공 유격전19의성단(義成團)1920회덕현단장 : 편강렬
양기탁남북만의 일제침략기관 파괴, 친일파 숙청20야단(野團)1920북만중동선단장 : 신포청림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21혈성단(血誠團)1920오운현단장 : 김국초
김춘일애국청년혈성단이라고도 하며, 일제기관 파괴에 주력22신대한청년회
(新大韓靑年會)1920혼춘현회장 : 이경호훈춘지역 한인 청년으로 조직23대한청년단
(大韓靑年團)1920연길현단장 : 서성권
강백규24복황단(復皇團)1920혼춘현공교회원이 단원, 주로 군자금 모집→상해 임시정부25창의단(倡義團)북간도이범모북간도와 무산지방에서 활동26청년맹호단
(靑年猛虎團)북간도단장 : 김상호명동학교와 정동학교 교직원과 학생들로 조직27외정회부(外政會部)혼춘현28학생광복단
(學生光復團)왕청현김승29보합단(普合團)1920평북의주군 및 관전현김중양, 박초식군자금 모집→임시정부30보황단(普皇團)북간도31충열대(忠烈隊)연길현32건국회(建國會)혼춘현황병길, 박치환33자위단(自衛團)연길현단장 : 최경호국자가 소재 중국도립중학교 한인 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34대진단(大辰團)1920안동현단장 : 김중건무장 청년단원 200여 명으로 구성35향약단(鄕約團)관전현단장 : 백삼규무력에 의한 조선왕조 복벽주장, 이후 대한독립단에 통합36의용단(義勇團)1920관전현국내 및 중국 각지에 지단 설치 활동37무장단(武裝團)1920관전현38청년단(靑年團)1920관전현39농무회(農務會)1920임강현김종범독립군 단체와 통합작전 전개40한교민단(韓僑民團)1920관전현41광복군총영
(光復軍總營)1920관전현총영장:오동진
조병준임정산하 전투군단, 국내지단인 천마산대 국내 일제 주재소 파괴42대한신민회
(大韓新民會)1920혼춘현회장 : 김규면기독교 성리교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 블라디보스톡에 지단 설치, 청산리전투 참가43전국청년연합회
(全國靑年聯合會)1919소왕령유영락, 오익표44노인단(老人團)1919해삼위단장 : 김치보강우규의사 의거(서울역 재등실 조선총독 저격)45소년애국단
(少年愛國團)해삼위정창선46부인회(婦人會)해삼위회장 : 이의순47원호회(原戶會)1919노령각지회장:니그나치48한인사회단
(韓人社會團)1920해삼위회장 : 장도정49대한독립군결사대
(大韓獨立軍決死隊)1920시시지미국내진공전 전개 일제기관 파괴

* 1919년과 1920년에 결성된 독립군 단체만 조사하였고, 궁서체는 노령지역 독립군 단체임.
2012-04-23 16: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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