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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32회 국민강좌] 한국독립운동사의 재인식 - 국학원
icon 당산대형
icon 2012-04-24 13:58:38  |  icon 조회: 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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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32회 국민강좌] 한국독립운동사의 재인식 - 국학원

[32회 국민강좌] 한국독립운동사의 재인식(일제하 학생운동의 역사적 위상)
김호일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학생운동이란 학구생활의 범위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 걸쳐 기대에 어긋나는 현실을 개혁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정의감으로 삶의 진실을 추구하고자 국권, 민권으로 시작된 학생운동은 국민들에게 문자를 보급하고 영농방법을 알리는 문화계몽 운동으로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민족독립운동을 끊임없이 확산시켰다.

세계사적으로 학생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19세기 이후부터이다. 1815년 통일과 개인의 자유를 목적으로 조직한 독일의 ??학생결사 Bruahenshaft?? 와 1831년 이태리의 학생과 청년들이 이태리를 자유와 평등의 공화국으로 통일할 것을 주장하고 조직한 ??청년 이탈리아 Glovinsgtalia?? 가 시작이었다. 아시아에 있어서도 1919년 중국의 북경대학생들에 의한 5 ? 4운동도 배일(排日) ? 민족자결(民族自決) ? 군벌타도(軍閥打倒)를 부르짖으며 반제 항일운동을 일으켰 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선조의 성균관(태학)의 유생들이 국왕세력을 견제하기위한 상소제도와 구원제도가 있었으며 단식투쟁이나 성균관을 비우는 공당(空堂), 권당(勸堂)으로 무시하지 못한 역사가 이미 있었다.

우리나라의 근대학생운동은 19세기말 신교육운동으로 교육기관이 설립되고 학생계층이 형성되면서 싹트기 시작한 운동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던 시대에 반봉건(半封建) 반외세(反外勢)정신으로 안으로는 근대화를 통한 근대사회건설에 앞장섰고 밖으로는 외세에 대항한 주권수호와 주권회복의 항일독립운동으로 전개된 특징이 있다.

학생운동을 단계별로 분류해 보면 제1단계로 개화?애국계몽기(1876~1910)는 근대화와 국권회복을 전제로 추진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1896년 서재필을 주축으로 배재학당학생들이 결성한 ??협성회??(協成會)가 있다. 이 조직체는 장래 민주국가가 될 것을 예상하고 의회제도를 알리고 의원을 양성하기위해 만든 신교육기관으로 젊은 2세들에게 훈련을 시켰다. 처음 13명에서 다음해 200명으로 늘어나고 1898년에는 주위에 있던 경신학교와 이화학당 학생들이 들어와 500명으로 늘었다. 이 학생단체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배재학당운동장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이때 주제는 한글을 쓰는 게 옳은가? 한자를 쓰는 게 옳은가? 하는 일반적인 문제로 일반인도 참석하여 박수의 다수로 결정하는 열린 계몽운동이었다. 국민들을 깨우치게 하기위해 패싸움을 가장하여 종로 보신각네거리에서 싸움판을 벌려 사람들이 모여들면 연단에 올라가 가두연설을 하고 학술강연회를 통해 국권, 민권을 주장하며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제2단계로 1910년대 학생운동은 일본제국주의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한 민족독립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일제의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 정책에 대항했다. 학생들은 학교설비나 시설을 문제 삼고 일제 국경일에 참석하지 않는다거나 노래도 부르지 않는 동맹시위로 시작해서 구실을 만들어 동맹휴학을 시행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들 600여명이 조선독립청년단을 만들어 2·8독립선언 시위운동은 학생들의 순수성과 정의감의 발로로써 전개된 독립운동이었다. 33인에 의해 거국적인 운동을 전개한 3 ?1 운동에 있어서도 일제의 철통같은 탄압정책에 경성에서만의 시위운동으로 끝나면서 무기력해질 때 전국으로 확산되고 전 국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의 줄기찬 운동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19년 3월5일 서울역 광장의 만세 독립시위는 학생들만의 항일운동이어서 3 ? 5 학생운동으로 명명 할 수 있는 의의가 있다.

제3단계로 1920년대에는 일제의 문화정치(文化政治)에 맞서서 실력양성의 목표아래 교육의 진흥, 산업의 개발을 추진하던 민족운동과 발맞추어 다양한 방법의 항일운동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일선내조론으로 회유책과 탄압을 병행한 일제에게 대항한 학생들은 1926년 학생단체를 결성하여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26년 순종(純宗)의 인산일인 6월10일에 일어난 운동을 전후로 조선학생회(朝鮮學生會)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등 전국의 학생들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동맹휴학을 전국의 각급교육기관에서 일으켰다. 이때 일제의 교육과 통치정책을 규탄한 운동은 학교시설과 수업방법을 시정하여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고 조선역사를 가르치기를 요구했다. 또한 학생회의 자치를 허용해줄 것과 언론집회자유를 보장하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년 83회의 동맹휴학을 거행하며 일제총독부 정치에 저항한 자유 독립 국가를 만들기 위한 항일운동으로 1921년에서 28년까지의 학생들이 1560명이 퇴학되었고 7674명이 구속되었으며 172명이 제적되었다. 이때의 우리나라 모든 학생수 54만명 중 8000여명이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입학할 시의 반수만 졸업했을 뿐 반수는 퇴학과 구속 또는 자퇴처리 되었다. 1929년 11월3일 전남광주를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벌인 11?3학생운동은 3?1운동이후 우리민족이 일제와 대항하여 전개한 독립운동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이고 격렬한 민족운동이어서 1920년대를 항일독립학생운동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제4단계로 1930년대는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에 대항한 반제 ? 반전운동이었다. 이때의 학생운동은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문화민족으로서 긍지를 갖게 하기 위한 문자보급운동을 펼쳤고 교내문제를 벗어난 학생들은 31년엔 107회, 34년엔 104나 되는 동맹휴학으로 황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회문제로 반제(反帝) 반전(反戰대동아전쟁)을 내건 항일운동이었다. 1930년대 학생운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비밀결사에 있었다. 대부분 독서회(讀書會)라는 명칭으로 조직된 단체들은 반전, 반제의 성격을 명확하게 천명하면서 학교와 지역을 연합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31년 경성제대 반제부에서 경성치과의전, 제2고보 , 경신학교, 법학전문, 기독교청년회 학관의 학생들이 참여한 반제경성도시학생협회의(反帝 京城都市學生協議會)였다.

제5단계로 1940년대의 학생운동은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희생되어 가는 민족의 아픔을 과 학생 자신들도 개죽음당하는 전장에 끌려가는 상황에서 극렬하게 저항했던 민족운동이었다. 단말마적인 일제에 대항하는 학생들은 경복중학을 중심으로 서울 각급학교생의 비밀결사 흑백당이 조직되고 각 학교별로 조직되어 확산되었다. 비밀결사대는 가두시위와 학병거부 등으로 항일민족운동의 최후를 장식했다. 이와 함께 한국 근대학생운동사상 마지막 항일 시위운동을 감행한 부산의 동래중학, 부산제2상업학교 1000여 명의 학생시위는 우리나라 근대학생운동의 최후를 장식한 쾌사중의 쾌사였다. 1944년 1월 20일 일본군에 강제로 입대한 한국인 학생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군국 파쇼 일제에게 저항한 것은 학생만이 가지고 있었던 순수성과 정의감과 애국애족의 민족정기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근대역사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있지 못한 학생운동은 독립운동사와 문화운동사, 교육사에 있어서도 학생운동은 별로 인식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위해 계몽운동을 하고 항거운동을 하며 줄기차게 확산시켜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학생들의 운동은 다시 재인식해야 마땅하다.
2012-04-24 13:5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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