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국학원> [36회 국민강좌] 한국 속의 세계 - 국학원
icon 당산대형
icon 2012-04-26 11:54:38  |  icon 조회: 4642
첨부파일 : -
<국학원> [36회 국민강좌] 한국 속의 세계 - 국학원

[36회 국민강좌] 한국 속의 세계
정수일 | 단국대 사학과 교수


우리는 역사문화 인식을 세계와 고립시켜 수직적으로만 헤아릴 뿐 세계와의 연관을 폭넓은 인식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역사와 문화가 지닌 세계성이 탁월한데도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해, 우리 스스로가 자해적인 역사인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까닭이고 ‘은둔국’ 또는 ‘닫힌 나라’라는 자학적 사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 속의 세계성이란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 함께하는 정신으로서 우리의 세계성은 ‘세계 속의 한국’과 ‘한국 속의 세계’로 표현되며 이 세계성은 오늘과 내일에 필요한 정신일 뿐만 아니라 어제부터 있어 온 역사적 실체이다. ‘세계 속의 한국’은 바깥에서 세계와의 만남이고 ‘한국 속의 세계’는 우리 안에서 세계와의 만남으로 세계의 삶이 우리문화 안에서 함께 공유함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고인돌(지석, 돌멘)문화와 벼문화, 황금문화를 들 수 있다.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알고 있는 고인돌은 전 세계에 약 5만 5천여 개가 있다. 그 중 4만여 개가 우리나라에 있어 동북아 돌멘권을 형성하는 고인돌문화대의 핵심국은 우리니라라 할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고인돌은 북한에 17000여기가 있고 나머지는 남한에 있다. 특히 전라남도에만도 2만여 기가 넘는 고인돌을 보유하고 있음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모른다.

범지구적인 문명권으로 쌀 문화를 뺄 수 없다. 세계에서 벼농사를 짓는 나라는 110여 개국이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벼농사이지만 재배면적의 90% 이상은 아시아다. 벼농사의 기원은 아직 분분하다. 쌀 원산지는 아프리카 니제르지역과 동남아시아로 아프리카는 점차 사라지고 고온다습한 기후의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국 등 많은 지역에서 쌀 생산지로 발달했다. 그러나 건조하고 찬 발해지역에서 훌륭한 쌀이 생산되었다. 이곳의 쌀은 원나라 때는 물론 모택동 시대에도 최상의 쌀로 인정받아 특구로 지정되어 진상케 하였다.

우리나라 쌀도 자타가 인정하는 품질이다. 1920년대 일본은 우리나라의 벼농사 시작을 서기 전 1세기로, 일본은 서기 전 3세기라고 주장하며 벼농사는 일본에서 조선이 수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여주와 충남 부여에서 기원전 100년 전의 볍씨가 나오고 90년대는 김포, 일산에서 기원전 200년 전의 볍씨가 나왔다. 1998년과 2001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의 구석기유적에서는 볍씨 59톨이 발견되어 측정한 결과 17,000~13,000년 전의 볍씨임이 밝혀졌다. 미국에서의 측정결과 역시 15000~13000년으로 나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오로리카’)로 인정받았다. 수천 년간 세계와 유대관계를 이어준 벼는 우리가 원조격인 것이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경까지 약천여년 동안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동서에 형성된 황금문화대도 세계적이다. 스키타이문화가 그리스까지, 중국의 북방 유목민족이 중국 화북으로, 신라는 황금문화대의 동단에서 가장 전성시대를 구가한 나라로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게 황금문화를 꽃피웠다. 황금문화의 대표적인 유물이 금관이다. 세계의 고대 금관 10점 중 우리나라 것이 7점이나 된다. 가야 금관이 1점, 신라 금관이 6점이다. 경주의 150기 고분 중 30기에서 나온 금관이 7개이니 앞으로 얼마나 더 나올지 기대된다. 이렇듯 신라는 최고의 문명을 누리고 세계적인 문명을 갖고 있었다.

문명은 자생적으로 발전된 문명과 모방문명이 있다. 지금도 일각에선 우리나라문화를 모방문화라 일컫는다. 그러나 우리문화가 모방문화라는 말은 일제시대에 굳어진 우리들의 인식일 뿐이다. 물론 처음 외래에서 들어온 문물이 우리문화와 장기간 어울리면서 공통적인 문명을 공유하기도 하나 우리는 타문화를 받아들여 창의적인 발전을 이루어 독특한 문명을 이루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석굴암이다.

전 세계에 석불은 다양하고 많다. 기원전 2세기 인도에서 출현한 불교의 석굴문화는 자연동굴을 이용해서 불상을 앉혔다. 토질이 석회석이라 불상도 석회석이나 대리석 불상이다. 그러나 신라는 산을 깎고 단단한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불상을 앉힌 후 천장을 만든 인공동굴이다. 특히 본존불은 완전한 균형미의 예술작품으로 엄밀한 비례가 과학적이다. 이 불상의 모델은 인도 부다가야 대각사(大覺寺)에 봉안되었던 본존불 정각상(正覺像, 높이 3.36m)이다. 정각상은 부처님이 대오각성 하셨을 때의 모습을 조각한 상이다. 서역에 간 현장스님의 기록을 바탕으로 신라는 손가락으로 상징하는 방향까지 세밀하게 관찰하여 창의적인 높이 3.4m로 얼굴과 어깨 가슴 무릎의 넓이 비율이 1:2:3:4의 자연적인 모습이다. 전체적인 모습도 당시 신라인들의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반영해 지상세계인 전실은 네모꼴로, 하늘세계인 주실은 둥근 모양의 돔 천장으로 꾸몄다. 불상 40상을 비롯해 불교적 주제와 신라인들의 종교관, 간다라미술과 신라인들의 미의식을 총체적으로 융화시킨 ‘동양의 최고 걸작품’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되었다. 비록 특정 불교문화지만 전통문화의 바탕 위에서 외래문화를 창의적으로 수용해 고유문화로 승화시킨 것이다.
타문화의 유입처럼 이방인의 대우 역시 배타적이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설화이다.

‘형용가해 의건궤이(形容可駭 衣巾詭異)’하여 ‘산해정령(山海精靈)’
이라고 한 이방인 처용(處容)을 너그러이 받아들여 직급을 주고 정사를 돕게 했 을뿐만 아니라 미녀까지 아내로 맞게 한 것으로 보아 신라인들이 이방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설화의 주인공으로 가공하고 부풀려서 신라의 대표적 향가로 승화시키면서 윤색은 되었겠지만 이방인을 수용하는데 배타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세계를 끌어들여 승화시킨 대표적인 유물중 하나가 팔만대장경이다. 불경은 여러 나라에도 많이 있다. 우리나라 팔만대장경은 송나라나 거란 등 주변국들의 장경을 참고로 하여 고려 현종 때, 1차로 77년간 6000권의 대장경을 제작하고 2차로 20년에 걸쳐 4700권을, 3차로 16년간에 완성한 대장경이 81만 3~4천여 장의 목판경이다. 시작에서부터 완성 시까지는 장장 240년(1011~1251년)간이다. 동아시아의 20여 종류의 대장경 중 우리 팔만대장경이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경이라 자부한다. 이 대장경에 눈독을 들인 일본은 수(83회)차례에 걸쳐 가져가려고 했다. 심지어 조선 세종 때는 일본 사신들이 와서 3일간 단식농성을 펼치기도 했다. 이렇듯 우수한 재질과 과학적 공정을 거쳐 5200만자(字)로 된 이 팔만대장경은 세계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역사로 고려불교의 ‘꽃’이고 고려문화의 ‘금자탑’이며 불교경전의 ‘총서’이다.
고려가 최고의 문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튼튼한 국력과 높은 문화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귀화인에 대해 누구든 거부하지 않고 외국인을 수용한 ‘내자불거(來者不拒)’의 귀화책(歸化策)이었다. 1985년 통계청에서 조사한바 우리나라 성씨는 총 275개이고 이 성씨 중 귀화성이 130여개다. 절반의 성씨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의 성씨인 것이다. 들어온 성씨를 예를 들면 화산(花山)이씨이다. 그 시조는 월남의 첫 독립황조 8대왕의 아들이며 9대왕의 숙부가 되는 용상이다. 그는 군 총사령격인 군 총관으로 정변이 일어나자 배로(보트피플) 피신하여 우리나라 웅진반도에 도착했다. 때마침 그곳은 몽고항쟁 할 때라 항쟁에 가담하였다. 그의 가상함이 알려져 화산(花山) ‘이’라는 성씨를 부여받은 그는 이용상(李龍祥)이다. 그의 아들은 안동부사를 지냈다. 이 가문은 현재 120여 가구로 1400여명이다. 월남이 통일된 이후 이 종친회에서 처음 월남을 방문(1980)했을 때, 총리가 접견하는 등 왕족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같은 월남사람으로 정선 이씨를 부여받은 사람도 있다. 고려 명종 때 14년간 무신 철권을 휘두르던 이민이다. 현 50개의 집성촌이 있고 약 3만여 명의 후손이 있다. 위그루의 회회인 쌍거는 덕수(德水) 장씨를 받았다. 고려 충렬왕 때 몽골공주를 따라온 그는 장순룡(張舜龍)이며 높은 직급과 함께 사후 ‘숙공’이란 시호까지 받았다. 그의 후손 ‘장유’는 조선조 4대 문장가중의 한 사람이며 현재 그 집성촌에서는 매 10월이면 장말(장씨마을) 도당굿을 지낸다고 한다.

고려 광종 때 구주사람 쌍기(雙冀)는 법제청에 근무하다 고려사신을 따라 왔다가 병이 나서 개성에 눌러 앉은 사람이다. 우리나라에 과거총책을 세 번이나 연속 맡으며 과거제도를 정착시켰다. 이 때 귀화한 성씨가 60개 성씨이고 신라 때 40개, 조선 30개이다. 고려 초기 100년간은 무려 17만 명이 귀화할 정도로 조상들은 그들에게 의식주문제를 해결해 주고 사람에 따라 실력자는 등용을 시키고 범죄자일 경우는 섬에 거주케 하는 등 누구라도 살 수 있도록 선정을 베풀었다.

우리나라가 단일민족이라고 운운함에 이러한 우리 역사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정리해야 한다. 요즘 민족을 배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한 유명인이 “대학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구적인 시각으로 우리민족을 무턱대고 부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유럽은 민족을 자본주의산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양과 다르다. 유럽은 문명시대부터 분권주의(할거)제도였다. 옛날 그리스 로마시대는 물론 신성 로마제국의 봉건제도가 붕괴되고 독일이 통일될 때만도 300여개의 도시국가였다. 황제는 수도가 없이 떠돌아다닌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같은 민족, 같은 언어, 국어, 같은 감정 등 공통적인 것이 있을 리 없다. 자본주의가 상승되고 얻어진 민족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동아시아는 옛날부터 중앙집권체제로 유럽과는 절대 다르다. 공동의 문화의식이 깔린 ‘민족’ 그 자체가 우리 역사이고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 한 민족주의는 살아있다. 민족을 거론하며 내 놓는 폐단은 민족주의의 남용이고 오해이며 악용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우리 조상은 혼자서 살지도 않았다. 이방의 문화나 사람을 받아들여 더 좋게 발전시켜 왔다. 서학을 받아들임에도 우리는 같은 동양의 중국이나 일본과는 근본이 다르다.

조선시대에 서학을 받아들임에 우리나라는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운명이고 숙명이었다. ‘쇄국’이란 오해를 불러일으킨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실상은 한순간의 일시적인 몸부림일 뿐이었다. 일본은 에또(江戶)시대 264년간(1603~1867) 241년간, 도꾸가와막부(德川幕府)가 가혹한 쇄국정책을 단행한 결과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데는 조선보다 한발 늦었다. 중국도 국가권력의 개입으로 타율에 의해 받아들였다. 세상에서 이질적인 서양종교가 자율적으로 수용된 나라는 조선조뿐이다. 일본의 식민사관과 우리의 자학적 역사관에 의한 ‘쇄국’이란 오해와, 서구인들의 무지에 의한 ‘은둔국’이란 역사적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선은 열린 나라였다. 조선인들은 서양의 근대적 천문지리 지식을 동양의 전통 우주관인 혼천설(渾天說)이나 기철학(氣哲學)으로 재해석하고 서로를 조화 시키는 지혜를 발휘해서 ‘조선식 우주론’을 제시했다. 중화주의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넓은 세계로 눈을 돌리는 거시적 세계관을 소유한 우리겨레의 세계성(세계정신) 전통이 바로 한국 속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한국 속에 들어와 있는 세계와 그 세계성을 이해해야 비로소 세계사적 지평에서, 역사적 성찰로서 앞으로의 우리 지표가 뚜렷할 것이다.
2012-04-26 11:54:38
61.32.117.16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