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옛날 강가나 길가 혹은 큰 고개 입구에 있었던 주막은 대개 술을 팔고 잠을 잘수 있는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 1894년 조선잡기, 1604년 갑진만록, 1696년 문신 박만정의 해서암행일기에서 주막에 관한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집 나오면 즐겁고 / 집에 들면 시름이라 / 미친 노래 곤드레로 / 사십년을 보내었네”
추사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의 시 구절이다.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문경새재에 주막촌 그곳에는 운영하던 조령원(鳥嶺院), 동화원(桐華院)이 있었고,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의 전설과 함께 주막이 번성했던 곳, 경상도와 전라도의 길목인 섬진강 나루터의 화개(花開), 한지와 죽산물 곡산물의 집산지 전주 등 주막이 많았던 곳이다.
이곳은 국내에서 처음 도입된 피아노가 1900년 3월 미국 선교사가 부산을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1982년 이규환 감독의 화제작 “임자없는 나룻배” 촬영지이기도 하다. 주막의 기능은 ①손님에게 술을 파는 것 ②요기를 할 수 있게 밥을 제공하는 것이며 ③숙박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외에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으로 정보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고 문화의 전달처이기도 하였으며 휴식처가 되었고 유흥을 즐기는 오락장 역할도 하였다.
주막은 기방이나 색주가, 객주집, 여객과 달랐다. 가방(佳芳)은 기녀가 주로 돈 많은 양반들에게 기악(妓樂)과 함께 술을 팔았고 객주가는 접대부들이 술과 색을 팔던 곳이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선술집 등이 생겨났다. 색주가란 조선 세종때 생긴 것으로 주로 명나라에 사신가는 이들을 위하여 주색을 베풀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 와서 값이 비싼 기생집에 가지 못하는 부류들이 주로 색주가를 이용하였다.
선술집은 목로(木壚)라는 나무탁자를 두고 서서 간단하게 마시는 술집이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에서 선술집이 매우 번창했는데 일본 사람도 “다치노미”라 부르며 애용했다. 오늘날에도 술과 해장국을 파는 곳이 모두 옛 주막의 후신들이라고 할수 있다. 1970년도부터 30년간 진주에서만 볼수 있는 “실비집”이 거리를 메웠다. 안주는 무료, 술값만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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