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윤이상을 땅에 묻으려 하는가 1
누가 윤이상을 땅에 묻으려 하는가 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1.1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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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균/시인
먼저 통영에서 시작된 신숙자씨 모녀 구출 운동이 전 국민적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일은 오길남씨 한 가족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이기에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또한, 월북한 이들 모녀 외에 강제 억류된 많은 사람들도 함께 구출되어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는 이 일과 관련하여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에 대한 진실의 왜곡이 매우 우려스러운 지경에 이른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신숙자씨 모녀 구출운동이 통영시에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펼쳐온 통영국제음악제를 비롯한 윤이상 기념사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면 이는 분명 본질을 벗어난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의 발단은 신숙자씨의 남편인 오길남씨가 윤이상 선생의 권유로 월북했다고 말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오길남씨가 말하는 내용과 윤이상 선생이 밝히는 내용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더구나 오길남씨는 생존해 있지만, 윤이상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므로 자신의 견해를 밝힐 기회마저 사라졌다는 것이다. 가슴 아픈 것은 이 소모적인 진실게임에 국력이 낭비되고 국민 정서가 분열되고 예향 통영의 이미지마저 추락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5년 12월 오길남씨는 북한으로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월북했다가, 1986년 11월 오길남씨 혼자서 탈북한다. 그리고 1993년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 (자유문학사)란 책을 펴내었고, 다시 2011년 6월 6일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도서출판 세이지)을 펴내게 된다.

그는 책을 통해 윤이상 선생이 월북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언론을 통해 이 일이 알려지게 되자 윤이상 선생은 한겨레신문에 ‘오길남 사건과 나’란 글을 보냈고, 1992년 6월 19일 “작곡가 윤이상씨 ‘오길남 사건관련설’ 반박 투고”란 제목으로 실리게 된다.

이 글을 보면 1977년 한민련 국제회의장에서 오길남을 먼발치에서 본 것이 처음이고, 1986년 11월 전화를 통해 “선생님, 저 오길남인데요 이북에서 도망해 왔습니다. 탈북 후 6개월 간 미국과 독일의 정보기관에 갇혀 조사를 받고 나왔는데,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란 말을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후 오길남씨의 간청에 의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1990년 민족통일음악제에 참석하여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신숙자씨의 편지와 음성 카세트테이프를 받아왔다고 한다. 오길남씨는 사진을 받고는 히히득 거리면서 “아이들이 못났는가” 하다가 “이제 가족 찾는 것을 단념하였습니다” 하길래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며 쫓아내다시피 했고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윤이상 선생은 말미에서 “이 글은 속임 없는 진실의 전부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길남씨는 1942년 경북의성에서 태어나 부산고교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0년 독일로 유학 가 1985년 브레멘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런 엘리트인 그가 윤이상 선생의 권유에 의해 가족과 함께 북한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납득 되지 않는다.

그의 저서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에는 월북의 동기가 수도 없이 나온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사회주의를 동경하였다”고 밝히고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이야말로 유토피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나의 이런 북에 대한 견해와 시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기독교 경건주의자인 게르하르트 브라이덴슈타인이었다. 그의 저서들과 북한을 방문하고 쓴 몇 편의 학술논문들에 깊숙이 빠져든 탓이었다”고 스스로 적고 있다.

북한 공작원과의 만남을 주선했던 친구 김종한의 말을 상기하면서 “파토스(격정)로 가득 차 있는 나에게,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궁핍한 상황에 처해있는 나에게 있어 그 말은 하나의 서광이자 한 줄기 희망과 같았다”고 기술하는 한편, “오로지 현실을 도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결국 나는 북행을 결정함으로써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했다”고 하였다. 이런 말들을 종합해 보면 그는 마르크스 경제학자로서 이상의 실현, 생활고에 따른 현실도피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월북이었음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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