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백세, 유취만년’
‘유방백세, 유취만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1.06 18:4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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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제2사회부 부장(함양)

 
연초가 되면 누구든 새해 운세가 궁금하다. 병신년(丙申年)의 병(丙)은 화(火)·남쪽·붉은색을 상징하고, 신(申)은 금(金)·서남쪽·가을을 상징하는 원숭이띠다. 그래서 붉은 원숭이의 해다. 올해는 강렬한 불(丙火)과 쇠(申金)가 만나 화극금(火克金)이 돼 사회가 혼란할 거라고도 하고, 올해보다는 나으리라는 풀이를 내놓는 이도 있다. 잘될 거라는 쪽으로 귀가 솔깃해지는 건 너나 없는 마음이리라.

지난 한 해 함양군은 많은 주민과 공직자들이 나눔과 봉사, 열정적인 노력으로 가슴 따뜻해지는 소식을 많이 선사해줬다. 반면 복지재단 보조금 비리, 함양농협 거액 횡령 사건, 가짜 산삼주 사건, 청렴도 전국 꼴찌, 비리의혹 공익감사 착수 등의 악재가 꼬리를 물며 ‘착한 함양’ 이미지를 무색케 만들었다. 물욕 가득한 일부 ‘갑’들의 이기심 때문에 함양 전체가 ‘복마전’이 돼버린 거다.

이런 경우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물 흐린다’, ‘열 사람이 한 도둑 못 막는다’는 속담이 제격이다. ‘안 들키면 그만, 들키면 재수 없음.’ 이런 퇴행적 사고로 점철된 일부 기득권 세력들의 철면피한 이기심이, 대다수 선량한 주민들이 애써 쌓아올린 ‘청정 함양’ 탑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거다. 당최 상생, 공존이 뭔지 모르는 이들에게 선조들의 족보나 역사적 평가들을 들춰보길 권한다.

‘있으렴 부디 같이,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네 싫더냐 누구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애닯구나, 가는 뜻을 일러라.’

조선시대 함양읍 출신의 뇌계 유호인(兪好仁) 선생이 외관직(外官職)을 자원해 나갈 때 성종이 만류하는 뜻을 표현한 유명한 시조다. 그는 시(詩)·문(文)·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삼절(三絶)로 불렸고 특히 성종의 총애가 대단했다. <국조인물고>에는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 군수가 되었을 때에 공이 제자(弟子)의 예를 행하기를 고집했으나, 점필재 공이 그를 친구로서 대접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학문과 덕행, 지조로 당대 으뜸이었던 김종직도 인정한 인걸이라는 얘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의정부·이조·관각 당상이 사가 독서(賜暇讀書)할 문신을 뽑아서 아뢰었는데, 이조 정랑 채수(蔡壽)·사헌부 감찰 허침(許琛)·봉상시 부봉사 유호인(兪好仁) 등이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사가독서는 인재 양성을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인데, 이에 뽑힌 자를 사가문신이라 부르며 큰 영예로 간주했다. 제도가 실시된 350여 년 동안 320명만이 누린 좁은 문이었으니, 요즘 말로 ‘가문의 영광’쯤 되겠다.

이처럼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홍문관 수찬과 교리, 사헌부 장령 등 잘나가는 중앙 관직을 사양하고, 부모 봉양을 위해 여러 차례 함양 인근의 외관직을 자청해 나갔다. 임금과 당대 최고의 실력자를 ‘빽’으로 둔 인재가 명예와 출세와 돈이 보장되는 중앙 권력기관을 박차고 스스로 시골로 낙향한 것. 요즘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 선택이 뇌계 선생의 이름을 오늘까지 살아 있게 한 동력이다.

이런 뇌계 선생이나, 청백리로 이름을 떨친 일로당 양관 선생 같은 삶을 살기란 보통사람으로선 어렵다. 그러나 이분들처럼 ‘유방백세(流芳百世)’는 못 되더라도 ‘유취만년(遺臭萬年)’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자기 생전에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부귀권세 누리다가 죽으면 그만인 것 같지만, ‘꽃다운 이름’ 못지않게 추한 행위의 ‘악취’ 또한 오래 남아서 남겨진 식솔과 자손들의 앞날에 두고두고 먹구름을 드리운다.

‘물러나야 할 때, 죽어야 할 때를 알아야 대장부’라고 했다. 일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위해 물러나거나 죽어야 할 때를 놓친 이완용은 매국노·간신배의 대명사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자기 배 채우기에 급급하던 탐관오리 조병갑은, 백성들에게 강요해 세운 선정비가 지금도 함양 상림 한켠에 서서 경멸과 지탄을 영구히 감내해야 할 듯하다.

죽어야 할 자리에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안의현감 곽준(정유재란 때 황석산성 수비장)은 ‘일문삼강’(一門三綱·한 가문에서 충·효·열 삼강이 모두 나왔다는 뜻)이라는 극상의 명예를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충신·대장부의 표상이 됐다. 망국의 위기에서 잠든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몸을 던진 민영환은 하늘이 ‘혈죽(血竹)’으로 표상하고, 잊혀지지 않는 만고충신의 반열에 들었다. 죽어야 할 자리를 적극적으로 찾아간 안중근 의사야 더 말할 나위가 있으리.

역사의 평가는 자신이 선택한 오늘의 결실이다. 자기 영달과 주머니 채우기로 ‘선비의 고장’에 먹칠하고 있는 분들께, 역사와 족보에 조병갑으로 남을지 유호인, 양관으로 남을지 택하라며 이렇게 묻고 싶다. “그리 살다 나중에 저승 가서 할아버지들 무슨 낯으로 뵐 건가요?” 1월 1일 떠오르는 새해를 보고 간절히 빌었다. 이 땅의 조병‘갑’들이 다 갱생해서, 빽 없고 힘없는 모든 ‘을’들과 함께 잘살려고 하는, ‘홍익’하는 상생의 대동세상이 어서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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