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수승대 문화유산 나들이
거창 수승대 문화유산 나들이
  • 거창/최순경기자
  • 승인 2016.01.21 19:02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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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 ‘멋과 흥’ 찾아서
 

거창군은 위천면 수승대를 베이스캠프로 위천, 북상면 일원의 주변문화유적지를 도보로 둘러보고 돌아오는 문화유산 여행길을 조성했다. 숲길을 걸으며 옛 선비들의 멋과 흥을 찾아 떠나보는 기회와 문화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이색경험을 할 수 있다.


코스는 총 2개로 이뤄져 있으며 수승대 주변의 모든 문화유산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볼 수 있다.

제1코스는 동계 정온 선생이 생전 강동에서 모리재로 걸어다닌 길로 예상되어 그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코스로 조성 수승대-정온선생종택-모리재-강선대-농산리고인돌-만월당-갈계숲-행기숲-농산리석조여래입상-용암정-수승대 코스로 14km에 약 4시간30분 소요되며 트래킹 코스로 적당하다.

제2코스는 1 코스와 달리 모리재를 가지 않고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코스를 조성했으며 강을 따라 수승대-정온선생 종택-농산리석조여래입상-강선대-농산리고인돌-만월당-갈계숲-행기숲-용암정-수승대 코스로 9.9km에 약 2시간40분 소요된다.

수승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쳤던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위치하는 화강암 암반으로 깊고 긴 계곡과 주변 임야와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고 조선 때는 안의현에 속해 있다가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산수유람 문화가 결합된 장소적 상징성이 큰 명승지이다.

또한 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거창군은 지난 2013년 6월 말부터 수승대에야영장(데크)과 오토캠핑장을 운영하고 있으며인터넷 예약제로 수승대 홈페이지(ssd.geochang.go.kr)에서 예약할 수 있다. 단 2월 8일에는 설연휴로 캠핑장 운영을 중단하니 유의해야 하며 최소 30일 전 예약해야 한다.

오토캠핑장은 총 15면(한면:9mx8m)으로 이뤄져 있으며 요금은 2만5000원(전기사용료 포함), 1인당 최대 3면을 예약할 수 있으며 최대 예약 가능시간은 2박3일이다.

야영장(데크)은 총 84면(한면:4.8mx3.5m)으로 요금은 1만원(전기사용료 포함), 1인당 최대 2면을 예약할 수 있으며 최대 예약 가능시간은 2박3일이다. 휴대용버너는 사용가능하지만 숫불이나 착화탄 사용은 금지하고 있다.

 

 

정온선생종택은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인 정온(鄭蘊 1569~1641)이 태어난 집으로 후손들이 순조 20년(1820년)에 다시 짓고 정온의 신위를 사당에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두줄박이 겹집에 내루에 눈썹지붕이 따로 설치돼 있다.

정온선생은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광해군 2년(1610년)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했다. 그후 16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다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에서 10년간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하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석방되어 헌납에 등용됐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척화(斥和)를 주장했지만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뤄지자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거창군에서 은거하다 5년만에 죽었다. 절개와 충절이 높은 선비로 평가되며 그를 기리는 사당 모리재(某里齋)가 있다.

▲ 거창농산리석불입상
수승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황강의 발원지이기도 한 월성천이 흐르는 월성리 황점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에 있는 농산리 석조여래입상(石造如 來立像)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높이 2.62m의 원각상(圓刻像)에 가까운 고부조(高浮彫)의 입불상으로 같은 돌로 조성된 광배와 신체는 자연 암반을 이용한 대좌에 끼워져 있다.

지난 1972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됐다가 2005년 보물 제1436호로 승격되면서 거창농산리석불입상(居昌農山里石佛立像)으로 명칭이 변경됐다.음각선인상 입석은 고인돌과 함께 큰돌 문화의 일종으로 선돌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2m가 넘는 입석의 전면을 다듬어 결가부좌해 양손을 합장한 선인의 모습을 얕은 선조線條로 새겨져 있다. 선사시대에는 고인돌 주변에 설치되어 묘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했고 역사시대에 와서는 마을 입구에 세워 귀신을 막거나 경계를 나타내거나 토착신앙과 합쳐져 장수를 비는 칠성바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농경사회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의식이나 인간과 가축의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식에 사용되기도 했다.

만월당(滿月堂)은 만월당 정종주(鄭宗周 1573~1653)를 기리기 위해 1666년에 건립한 건물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1786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갈계숲과 행기숲을 지나 용암정에서 다시 수승대로 되돌아온다. 거창/최순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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