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진 곳에서 ‘남몰래’ 나눔의 손길 6년
그늘진 곳에서 ‘남몰래’ 나눔의 손길 6년
  • 함양/박철기자
  • 승인 2016.01.27 18:34
  • 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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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이정헤어커커 이정훈 원장과 ‘Secret 봉사단’

▲ 이정훈 이정헤어커커 원장.
함양정신요양원 미용 봉사 현장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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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보이려는 가식아닌 대가없이 ‘베푸는 사람들’
2011년 미용학원 사제인연 의기투합 ‘Secret 봉사단’
“여건이 되는 한 작은 나눔이지만 이웃과 정 나누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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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를 넘나드는 혹한이 맹위를 떨치던 20일 오전 10시 함양군 수동면의 ‘함양정신요양원’에 들어섰다.
보통 ‘정신병원’이라면 폐쇄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우려와 달리 입구부터 정갈하고 밝은 분위기다. 마침 이날은 전체 직원회의가 있는 날이라 수십 명 직원들의 밝고 활기찬 모습들이 깨끗한 시설과 어우러져 이런 선입견을 떨치게 했다.

함양정신요양원은 1985년 서부경남 유일의 정신장애인 요양생활시설(정원 210명)로 설립됐다. 생활기술훈련, 사회적응훈련, 교육재활훈련, 가족교육 등을 통해 정신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복귀를 지원하고 있다.

사무과 직원 A씨는 “현재 환자 165명이 생활하고 있다. 과거 200여 명까지 있었는데 점점 줄어가고 있는 추세다. 지역마다 정신요양원이 많이 생겨서인 것 같다”고 말했다.

▲ 20일 미용봉사에 참석한 ‘시크릿봉사’ 단원들. 왼쪽부터 이윤희, 김영화, 유진아, 조윤주, 이정훈씨.
이날 봉사에 참석한 사람은 함양읍 이정헤어커커 이정훈 원장(52)과 이윤희(38·여·진주시 B미용실 원장), 김영화(52·여·진주시), 유진아(30·여·진주시), 조윤주(38·여·진주시 C미용실 원장) 등 다섯 사람. 진주에 거주하는 이들은 이날 봉사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식구들 챙기랴 도구 챙기랴 바쁜 준비 끝에 참석한 것이다. 봉사 계기와 소감을 묻자 모두들 손사레를 치며 사양하는 가운데, 이윤희 원장이 밝은 목소리로 답한다.

“봉사가 하고 싶어서 시작했고, 이 일이 즐겁다. 기본적으로 미용은 좋아하는 일이니까. 하루 날 잡아서 좋은 일 하고, 좋은 사람들과 만나 수다 떨며 기분 전환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기분도 들고, 안 좋을 이유가 없다.”

▲ 1층에서 봉사하고 있는 유진아, 이윤희씨.
이들은 2011년 이정훈 원장이 진주 D미용학원에 출강할 때 사제관계로 만났다. 이때 미용 봉사를 하면 실습도 되고 좋은 일도 하니 좋지 않겠냐는 제안이 나왔고, 이 원장을 중심으로 8명 정도가 의기투합했다. 6년간 봉사를 이어오는 동안 미용실을 개업하거나 취업한 사람도 있어 멤버에 약간 변화는 있었지만 멈춘 적은 없다고 한다. 굳이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이번 취재도 많은 망설임 끝에 동의했다.

따뜻한 커피로 아침 한기를 녹이고 미용 봉사가 시작됐다. 생활관 1층과 2층에 각각 두 사람씩 자리 잡고 100여명 요양원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이정훈 원장은 아래 위를 오가며 뒤치다꺼리에 바빴다. 온돌방에 10여명씩 5~6줄로 대기하고 앉아 있고, 그 앞 두 개의 의자에 앉은 이를 상대로 익숙한 손길들을 놀린다.

지난해 2월 2대 요양원장으로 취임한 오정우 원장은 “6년여 전 미용 실습 겸해서 봉사를 시작한 게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입장에선 관심 가져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매월 잊지 않고 봉사까지 해주니 늘 감사한 마음이다. 이제는 환자들도 언제 오시냐며 기다릴 정도다. 우리가 식사를 한 끼 대접하려 해도 폐를 끼칠 수 없다며 나가서 사먹는다. 매번 따라 나가 사드릴 형편도 못 되고, 그게 죄송할 따름”이라며 감사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정신요양시설에 대한 편견이 개선됐으면 한다. 지금은 과거처럼 ‘혐오시설’이라는 인식도 약해지고, 기자님처럼 한 번 왔다 가신 분들은 선입견이 많이 바뀐다. 반면에 모르시는 분들이 아직도 부정적 인식을 가진 경우가 더러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봉사를 하며 기억에 남을 일이 많지 않았을까? 조윤주 원장이 좋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몇 년 전 함양 근처 마을회관을 돌며 어르신들 미용 봉사를 해드린 적이 있다. 아름다운 시골마을 정취를 느끼며 어르신들 말씀도 듣고 했는데 너무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 시골 풍경이 참 좋다.”

이들의 나눔과 베풂의 삶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조윤주 원장은 “이것 외에도 진주에서 여성자율방범대 활동도 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다면 이웃과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같다. 봉사도 봉사지만 팀원들이 함께 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즐겁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할 생각”이라며 활짝 웃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서구화의 소용돌이 속에 우리 고유의 착한 심성을 많이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자화상. 눈만 뜨면 살풍경한 뉴스와 귀를 의심케 하는 범죄들이 가슴을 삭막하게 만드는 요즘이다.

▲ 2층에서 봉사 중인 김영화, 이정훈, 조윤주씨.
그런 반면 이들이 붙인 ‘Secret’이란 모임 명칭처럼, 남에게 보이려는 가식이 아니라 대가 없이 나누고 베푸는 따끈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주위엔 아직도 많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 되면 기다리고 있을 얼굴들이 눈에 선해서 이제는 안 올 수가 없다. 여건이 되는 한 계속 지금처럼 작은 나눔을 통해 소외된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

힘주어 말하는 이정훈 원장의 수줍은 듯한 미소 뒤로, 아이들처럼 기대에 찬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요양원 식구들의 모습이 친근하게 오버랩되며 훈훈한 공기가 가슴 밑바닥까지 전해졌다. 함양/박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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