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2.18 18:2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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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정/제2사회부 본부장(산청ㆍ함양ㆍ거창)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952년에 발표되고 이듬해에 시집 ‘꽃의 소묘’에 수록된 김춘수의 시 작품이다. 꽃은 인간의 명명 행위 이전에는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여기서 유추되는 그는 사물과 언어의 관계다.

1연은 명명 이전의 단계, 2연은 명명과 동시에 ‘꽃’이 존재한다는 사실, 3연은 ‘꽃’에 비유되는 ‘나’의 존재, 4연은 우리들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모든 사물들이 언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세계를 노래하며 이런 점에 이 시의 시사적 중요성이 있다.(한국현대문학대사전 참조)

필자가 굳이 김춘수의‘꽃’이라는 시를 언급해 비유하고자 하는 이유는 지난 17일 산청군의회가 올해 의정 운영의 첫 장을 여는 ‘제235회 산청군의회 임시회’를 개회한 것과 관련해 허기도 산청군수의 소통과 불통에 관련한 문제를 언급하고자 함이다.

허 군수의 불통과 관련해서는 이미 수차에 걸쳐 보도된 바와 같지만 자뻑(스스로 自와 강렬한 자극으로 정신을 못차린다는 의미의 속어(俗語)인 뻑이 합성된 신조어로 자기 자신에게 도취돼 정신을 못차린다는 뜻)에 취해 대·소변의 구분조차 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른 모양이다.

말로는 소통을 외치면서 올해 첫 임시회를 가지는 장에서 군의 조직개편과 숱한 현안들을 의회에 상정하며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조차 행하지 않음에 기인한 필자의 비유다.

새해가 바뀌면 반평생을 보아왔던 사람을 지난해 마지막날 밤새 음통을 하다 헤어졌다 하더라도 해가 바뀐 후 아침에 길거리에서 다시 마주치는 일이 있다면 으레 상호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악수를 청하며 새해 복많이 받으란 인사를 주고 받고 밥집에 끌고가는 것은 예의범절을 떠나 기초적인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숱한 의안을 상정해 놓고도 해가 바뀐 첫 임시회에서 오찬은 역시나 군의원과 군수는 따로국밥이었다.

상식적으로 군수가 의회에 부탁을 해놓고 해가 바뀌고 공식적으로 첫 대면을 하는 자리에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최소한 의회가 마다하더라도 손을 억지로 맞잡고 끌고 가서라도 오찬을 겸하며 소통의 장을 마련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대한민국의 어느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과정까지를 이수한 고급인력에 대한 인성교육을 그 따위로 시켰느냐고 감히 허 군수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고 싶다.

고개를 숙일 줄 모르고 겸손함을 알지 못하고 주변의 참모들 조차 직언을 하지 못하게 하고 “언론의 비판 기사에 대해서는 신문을 던져버리고 따라서 비판기사가 게재되는 날엔 군 담당자가 비판기사를 게재한 언론과 관련해서는 스크랩조차 하지 못한다”고 한다.

군민의 힘을 빌려 주고 머슴을 세워 놨더니 이제는 그 머슴이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지경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될 수 있는 대등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다.

정책위라는 허 군수의 사조직이 뭐 그리 대단하고 소중한지 모르겠지만 의회보다 군민보다 앞서고 그 위에 군림하는 조직은 아니길 빌어본다.

누구와 밥을 먹느냐가 중요하기 보단 최소한 대·소변을 가려서 누어야 하는 기본은 지키길 바라고 군수의 권력은 군민으로부터 기인된 것임을 잊지 말길 다시 한번 당부드리며 또한 주변의 참모들 조차 같은 자뻑에 미친 내시와 간신이 되지 않길 진정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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