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가(名筆家)
명필가(名筆家)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2.23 18:3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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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옛 사람은 인간을 평가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 가운데 왜 서를 넣었을까?


서예는 한평생 연마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의 끈기와 집중력을 요구하며, 벼루는 2~3개쯤 구멍을 뚫어야 하고, 붓도 몇 백개쯤 몽달로 만들어야 한다. 글씨를 쓰다보면 성현들이 남긴 경전과 석학들의 저술들을 공부할 수 밖에 없다. 명필이 되려면 자기만의 독창성과 창의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글씨에는 이처럼 공적과 학문적 깊이 창의력이 들어가 있으므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명필가를 존중하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경주 안강의 명필 집안 쌍봉 정극후(1577-1658)는 효종이 대군시절때 사부(師傅)를 지내 정사부 집안이라고도 한다. 학덕과 인품이 뛰어났지만 글씨도 명필이었다. 그 후손들이 계속 명필로 배출 정극후로 부터 고손 노우 정충필(1725-1998)까지 4대에 걸쳐 명필가로 내려와 서당과 현판 글씨를 많이 만나볼 수 있다. 그의 후손인 정종섭 현 행자부 장관으로 부산 범어사 조사전(祖師殿) 현판과 주련글씨가 정장관의 글씨다. 이뿐만 아니라 대구 동화사 강화도 전통사 등 전국의 사찰등 현판과 주련글씨가 많이 볼수 있다. 정장관이 5살때 부터 정몽유어를 보면서 글씨를 익혔다고 한다. 우리나라 서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람은 추사 김정희(1786-1856)로 그는 학예일치(學藝一致) 즉 학문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정희는 조선시대 최고 명문가 집안중 하나로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임금의 사위였고, 아버지 김로경은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와의 절친한 사이였다. 김정희는 6세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였고 30세에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채 당파에 휘말려 제주도로 귀양 이곳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글을 쓰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8년 3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할 때 벼루 10개가 닳고 붓 천 자루가 몽땅 붓이 되도록 글씨를 썼다고 한다. 자기만의 글씨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추사가 태어나고 자란 충남 예산에 추사 고택, 경기도 과천에 추사 박물관, 제주도 유배했던 곳에 추사관 등 있다. 조선중기에 명필가인 한호(石峯)는 명필가로 벼슬은 정랑에 이르렀으며 송도(開城) 출생으로 어려서 부터 스스로 붓글씨를 익혔으며 타고난 천재에다 피나는 수련을 쌓았으므로 모든 서체의 각체가 묘경(妙境)에 이르렀다. 석봉 서체의 특징은 자기의 독특한 체풍(体風)을 세운데 있으며 선조임금도 그의 글씨를 보고 기(奇)하고 장(壯)하기 한량없는 글씨라고 찬탄했다. 서공(書家)의 서체는 독특한 체풍(体風)을 세운데 있으며 그는 안평대군, 김구(金絿), 양사언과 함께 조선초기의 4대서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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