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火病)
화병(火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2.24 18:4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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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권/산청 동의본가 한의원 원장

도시에 비해 의료시설이 부족한 시골에서 한의원을 하다 보니 진료실에서 상담하게 되는 질환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일상생활에서의 가벼운 염좌, 감기부터 시작하여 때로는 최상급 병원에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려보낸 질환까지도 보살펴야 한다. 제각기 불편한 부위는 다르지만 그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앓고 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희한한 병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화병’이다.


‘화병’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아마 대부분은 속 썩이는 자식들, 남편 또는 고된 시집살이로 모진 세월을 지낸 중년 이상의 여성을 떠올릴 것이다.

스스로 화병에 걸렸다며 푸념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지만 이 화병은 1996년 미국 정신의학회에 정식으로 등재되어 영어로도 우리말 그대로 ‘hwa-byung'으로 불리며 ’한국인에게 많이 나타나는 문화관련 증후군이며, 분노의 억제로 나타나는, 분노증후군의 일종이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한의학에서는 화병을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여 머리와 옆구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과 더불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병’이라고 정의한다. 흔히들 ‘울화병(鬱火病)’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하는데,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가슴의 답답함, 전신의 열감, 목이나 명치에 뭉쳐진 덩어리의 느낌, 치밀어 오름,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자주 느낌, 깊이 눌려 있는 분노의 감정 등의 증상을 보일 때 화병이라 진단할 수 있다. 화병과 우울증을 비교하면 우울증은 정신증상 위주로 우울함을 호소하고 부교감신경계가 과항진 되어 있는 반면, 화병은 신체증상을 위주로 분노와 억울함을 호소하고 교감신경계가 과항진 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울증은 주로 늘어지고 쳐진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고, 화병은 매우 흥분된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증상들을 살펴보면 화병은 중년 이상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생각보다 화병을 앓고 있는 연령층도 매우 다양한데, 20대 대학생부터 30~50대 주부, 60대 이후 노년층까지 폭넓게 보이는 편이다. 대부분은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학교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장기간 받고 있는 경우에 발생한다. 아무래도 성격이 예민하고 여리고 곧은 사람이 많은 편이기는 하지만 마땅히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고 장기간 견뎌온 경우에는 성격에 상관없이 나타난다.

화병을 진단받았을 때 환자분들은 치료보다는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해보려고 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하지만 몸에서 반응이 나타날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체적인 증상들이 추가적인 스트레스를 야기해 증상이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많다. 한의학에서는 주로 흉부 이상에 과도하게 몰려있는 열을 내리고 심리적 문제로 인해 곳곳에 맺혀있는 기운들을 부드럽게 풀어 기혈의 순환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치료를 도와주는 대표적인 약재가 바로 ‘진피(귤껍질)’이다. 여러 치료를 통해 신체적인 증상이 많이 개선되면 환자들이 심리적인 여유도 덩달아 생기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화병을 예방하기 위해, 그리고 화병의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트레스의 관리가 중요하다. 스트레스라면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고 시간 지나면 없어지겠지 해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방이 더러워지면 청소하고 몸이 지저분해지면 샤워하듯이 스트레스도 관리가 꼭 필요하다. 가벼운 운동이나 명상, 여가활동이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증상이 심한 경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원인을 피해버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만, 가족이나 직장과 같이 화병의 원인을 피할 수 없는 상태라면 적극적인 취미 생활 등 스트레스를 잊고 몰입할 수 있는 거리를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화병은 만성병으로 장기간 지속되기 때문에 환자는 그 사이 여러 병원을 다니며 여러 치료를 받다 한의원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신앙으로 이기려 기도원을 찾거나 굿을 하신 경우도 보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화병은 치료를 통해서 극복을 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좋은 효과를 보이기도 하며 연관되어 나타날 수 있는 다른 질병들을 예방할 수도 있다. 그리고 평소에 적절한 스트레스 관리를 통해 화병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월 대보름도 지나고 곧 있으면 양력 3월이다. 우리 도민분들의 각종 화병도 봄눈 녹듯이 없어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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