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정답은 지행합일(知行合一)에 있다
삶의 정답은 지행합일(知行合一)에 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3.01 18:17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범산스님/금인산 여래암 주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자. 큰 것을 내다보지 못하고, 멀리도 보지 못하며,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여 근시안적으로 살아가면 새우 잡으려다 고래 놓치게 된다.


나와 거리가 멀거나 낯선 사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까지도 차별 말고, 동등한 마음으로 대해주며 살아가자. 가족이나 친척,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나를 비난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도자들은 초면이건 낯선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를 포용하고 사랑한다.

우리는 속잎이 자라나면 겉잎은 젖혀지고, 새잎이 돋아나면 묵은 잎이 떨어진다는 것도 잘 알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다. 지혜로운 사람은 비수 끝에 묻어 있는 꿀은 핥지 않고, 아무리 갈증이 심해도 독약 파는 집 물은 마시지 않는다.

무지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독사는 무서워하면서도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는 무서워않는다. 그렇게 살아가면 서천(西天)에서 해뜰리 없다. 과일도 껍질보다는 알맹이가 중요하다. 내부단속부터 단단히 하여 천지개벽을 한다 해도 당황하지 말도록 하자.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바보멍텅구리 같이 보여 비웃거나 수군거리기도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 따라 흩어질 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는다. 나도 변해가고 있으며, 나라고 한 것도 내 것이라 할 것도 없다.

육체란 것도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육체가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육체에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며, 한평생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해왔던가.

그런데도 아무리 아프지 말라, 죽지말라해도, 이 몸뚱이는 결국 나를 배신하고 떠날 것이다. 그런데 죽음이란, 묘하게도 육신은 무너지되 정신만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수행자는 육신을 환난으로 여기는 반면, 중생들은 보배로 여겨서 죽는 순간까지 육신의 애착을 가지고 애지중지 한다. 자성(自性)이란 스스로의 성품이다.

이것을 본성(本性), 진성(眞性)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불(火)의 본질은 ‘태움’이어서 모든 것을 태울 수 있고, 물(水)의 본질은 ‘젖음’이어서 모든 것을 젖게 하며, 바람(風)의 본질은 날려 보내는 것이어서 냄새건 티끌이건 모두를 날려 보낸다. 우리의 마음, 의식의 본질은 ‘알아차림’이다. 그걸 알면 참새 그물로 기러기를 잡을 수가 있다. 마음이란 근본적으로 ‘청정함’, ‘고요함’, ‘지혜로움’이다. 그래서 마음은 청정하고, 고요하게 계발할 수 있고, 지혜롭게 발전시켜 나아갈 수가 있다. 생전부귀보다 사후 문장정도는 알고 살아가자.

모르고 살면 잘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새 바지에 똥 싸는 경우가 생긴다. 진실 된 삶의 기본은 언행일치에 있다. 진실은 행복의 씨앗, 거짓은 불행의 씨앗이다.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지만 언행이 거짓되고 천박하면 천한사람, 진실하고 고귀하면 고귀한 사람이 된다.

서까랫감 아끼다가 용마루 썩게 만든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끊임없는 분노와 슬픔으로 파괴적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도 천한 사람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벼룩의 간도 빼 먹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애욕의 종자를 뿌리 채 뽑아내버리고, 긍정적 삶이 되도록 노력을 지속해 해나가자. 물욕의 한가운데서도 지혜의 칼을 휘 둘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삶의 정답은 지행합일(知行合一)에 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현재는 과거의 미래이자, 미래의 역사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와 역사가 달라지게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