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기록문화 의궤
조선시대 기록문화 의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3.01 18:1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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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의궤(儀軌)란 의식의 궤범이라는 뜻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을 뜻하며 의궤는 조선왕실에 있었던 주요행사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이다. 왕과 왕비의 결혼, 왕실 구성원의 결혼, 세자 책봉, 왕의 행차, 장례식, 묘지 이전, 선대 지위를 높이는 추숭(追崇), 궁궐 건축, 왕릉 건축 및 개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 등 다양한 행사를 의궤로 만들었다. 조선은 예법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비슷한 행사를 치를 때 예법에 맞게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의궤를 통해 조선 왕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의궤는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졌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초기 것은 남아 있지 않고 조선 후기의 것으로 총 3천5백권이 넘는 의궤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왕실에 의궤를 담당하는 기관은 ‘도감’이고 총책임자인 도제조1명(정승) 제조3명(판서)으로 임명, 행사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 의궤를 만들어 활용하였다. 행사를 치르는 날은 도화서 화가들이 현장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남겼고 행사가 끝나면 도감은 해체되고 의궤청을 설치해 의궤를 만들기 시작했다. 의궤는 보통 5~9부 만들어 한부는 임금이 보고 나머지는 의정부, 춘추관, 예조사고(史庫) 등 보관했다.

임금의 것을 어람용 일반의궤는 분상용으로 어람용은 분상용에 비해 훨씬 화려했고 어람용은 필사의 수준으로 지질도 우수했고 천연 안료로 그림을 그린 뒤 고급 비단과 놋쇠물림으로 장정(裝幀)을 했다. 의궤는 글 보다는 그림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시각적인 면이 부각되어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 그림을 그려 설명을 적어 넣었기 때문에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의궤는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지정 의궤가 세계적으로 중요하고 고유하며 대체 불가능하다는 점을 높이 평가 받았다.

유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이념이었고 조선도 유교를 기반으로 세운 나라였다. 의궤는 유교사상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 지를 보여 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는 없는 고유한 문화이다. 의궤는 손으로 기록한 것이 대부분으로 내용이 같다고 해도 각각은 유일(唯一)하기 때문에 대체 불가능하며 보존의 가치가 있다. 1833년(고종3년) 프랑스 함대가 인천과 서울 근처까지 처들어온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의궤는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있던 것으로 정조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했으며 강화도 행궁(行宮)에는 외규장각을 만들어 분소라 불렀다.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는 2011년 반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외규장각 의궤는 297책 중 어람용이 총 290책에 이르고 분상용은 7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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