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믿음
신뢰와 믿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4.11 18:5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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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신뢰와 믿음은 차원이 다른 용어이다. 신뢰는 한 번 쌓이면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믿음은 쉽게 깨지고 부서진다. 신뢰의 동반자는 역설적으로 의심이고, 믿음의 동반자는 배신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 제1차 포에니 전쟁 시절, 로마의 장군 레굴루스는 전쟁 중 카르타고의 포로가 되었다. 카르타고는 일시적으로 승리했지만 로마의 저력이 두려웠다. 카르타고는 레굴루스에게 로마로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단 로마와의 화친을 성사시켜 달라는 조건이었다. ‘만일 로마와의 화친이 이뤄지지 않을 때는 반드시 카르타고에 돌아와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레굴루스는 약속을 수락하고, 로마로 귀환했다. 그러나 화친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레굴루스는 오히려 로마의 원로원 앞에서 전쟁을 촉구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레굴루스는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도 물론 알고 있었다.

“여러분 내게 불명예를 안겨줄 것인가요. 나도 카르타고에 가면 고문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끄러운 행동이 가져다줄 수치와 죄의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난 그들에게 돌아가기로 맹세했습니다. 돌아가는 것은 나의 의무입니다.” 요즘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까?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레굴루스는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자신이 중요하다고 하는 가치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은 남는다. 믿음을 위해서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레굴루스는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모진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격파한 것으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끝났다. 후세인들은 포에니 전쟁 중에 보인 레굴루스의 행동에 대해 수천 년 동안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역사는 두고두고 얘기하며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말한 것에 책임을 지는 레굴루스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동양의 역사에서도 찾아보자. 로마에서 레굴루스가 활약하던 시절보다 조금 이른 기원전 4∼5세기의 일이다. 당시 중국은 전국시대였다. 전국시대에서 첫 번째로 위명을 떨친 사람은 위나라 문후였다. 문후에게는 유명한 장군 악양이 있었다. 악양은 진나라 동쪽에 위치한 중산국 정벌에서 용맹을 떨쳤다. 문후는 전쟁에서 돌아온 악양에게 승전(勝戰) 선물로 밀봉된 상자를 주었다. 상자를 열어본 악양은 경악했다.

상자에는 금은보화와 함께 그가 중산국을 공격할 동안 대신들이 올린 그에 대한 탄핵 상소문들로 가득했다. 악양은 문후의 신뢰가 없었다면 중산국을 토벌하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자신의 목숨마저 부지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공을 시샘한 간신배들의 참소에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 상황에 놓였던 것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문후의 악양에 대한 신뢰가 그 자신을 스스로 전국시대 첫 번째 패자(覇者)로 올려놓았다.

2차 대전의 주역…히틀러는 건전성의 결핍으로 추종자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해서 패배했고, 반대로 처칠은 신뢰받는 리더십을 바탕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신뢰와 혼동되는 단어는 믿음이다. 믿음은 뿌리가 얕은 지식인 반면 신뢰는 뿌리가 깊은 진리이다. 믿음은 외면적인 반면 신뢰는 내면적이다. 믿음에는 진정성이 부족하다. 이를 테면 ‘내가 너를 믿는다.’고 할 때는 불신의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다. 신뢰의 동반자는 역설적으로 의심이다 의심을 거쳐야 신뢰에 도달할 수 있다.

의심하고 의심한 다음 받아들이는 것이 신뢰이다. 역사가 가르치는 것은 믿음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패자(敗者)가 되는 길은 믿음이고, 승자가 갈 길은 신뢰이다. 전쟁, 비즈니스, 인간관계, 사랑 그 어떤 분야에서든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두 가지 눈을 갖고 있다. 사물만 바라보는 눈이 하나고, 내면의 특성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둘이다. 후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일이 나라의 살림살이를 크게 꾸려가야 할 국회의원을 뽑는 날이다. ‘상주(喪主)는 풍수에 속고 풍수는 패철(佩鐵)에 속는다’라는 말이 있다.

의심하고 의심하여 후보자의 내면을 상세히 들여다보고 소중한 나의 한 표를 행사해야겠다. 이 나라 정치인들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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