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남해는 인맥들로 가득하다
보물섬 남해는 인맥들로 가득하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1.29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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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우/전 남해문화원장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유배지로 유명했던 곳 , 보물섬 남해에는 또 하나의 인맥들로 가득하다.

오늘날 남해가 낳은 인물들을 살펴보면 경영학을 비롯해서 이학, 농학, 의학, 경제학, 법학, 국문학 등 남해출신 박사취득자만도 올해 들어 9월 말까지 무려 약 250여 명이나 이르고 있다.

보물섬 남해포럼에 따르면 본 공동대표 류동길(숭실대 명예교수)을 비롯 김동규(고려대 명예교수)등 전국 각 대학교수만도 66명이나 되는데다 또 박희태국회의장을 비롯한 김두관 경남도지사 등 정계를 비롯한 법조계와 학계, 재계 등 관계 인사와 남해의 인맥은 전국 그 어느 지역에 못지않은 자랑거리로 부각되고 있다.

전국 132개 군 단위 지자체 중에서도 박사가 많기로는 당연 1위 일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이렇게 많은 박사를 배출하는 곳은 남해군을 제외하고 없을 것으로 본다.

전국 각 도처에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는 각 분야를 담당하는 전문인, 지성인, 경영인의 수준과 안목을 같이한 관료 출신, 군 출신 법률가, 경제전문가들이 순번을 다투며 엘리트 영역을 감당해 오고 있다. 따라서 이들 박사들은 경영학을 비롯해 이공학, 농학, 경제학, 법학, 국문학 박사 등 박사학위 취득자들로서 날로 배출되고 있는가 하면 현재 이들은 대부분 회사원, 연구원, 의사, 교수직을 맡고 있다.

이 모든 게 전통시대의 유배지로 유명했던 우리고장이라는 점에서도 수긍이 갈만도 하다.

여말(麗末)과 조선조(朝鮮朝)에 많은 문인달사(文人達士)들이 유배객으로 정배(定配)되어 이곳 주민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특히 조선조 전기에 한평대군(安平大君) ,(한호)韓濠, (양사참)楊士參과 더불어 4대 서예가로 유명한 자암(自庵) 김구선생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1519년 32세에 남해에 유배되어 10여년간 학문을 가르치며 남해의 찬가인 ‘기묘사화(己卯士禍)’ 등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었다.

그러한 영향 때문인지 남해군은 예로부터 도둑 없고 걸인 없고 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삼무(三無)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었다.

기후가 따뜻하고 자연경관이 수려한 이곳 남해는 특히 낙도에 지나지 않았던 고장! 그러나 크고 작은 정변이 있을 때마다 당대의 정객(政客)들이 이 고장에 유배되어 통한(痛恨)의 눈물을 뿌리다가 불귀의 객이 되기도 했다.

충성이 역적이 되고 역적이 충성이 되는 정치(政治)변란속에서 그 어느 지역인들 보다 일찍 개명된 것은 남해가 유배지로 되면서부터 당대의 벼슬아치들과 거물급 유배인, 그 시대에 있어서 내 놓으라 하는 귀족 선비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초 섬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인사지협(人多地狹)으로 인한 근면 성실함 또한 뛰어난 한국의 ‘덴마크’라고도 불러져 왔으며 생활력이 강하기로 유명하여 섬이란 서러움 때문에 못 배운 한을 풀기위한 교육열 또한 전국 그 어느 지역보다 앞서 왔었던 것이다.

남해를 떠나 있는 전국 경향각지에 있는 향인들만도 50여만 명에 달하면서 남해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다들 경제력이 풍부해 잘 살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이곳은 3·1정신을 면면히 이어온 수많은 사람들로 독립투사 및 애국지사로 옥고를 치르는 등 우여곡절의 갖가지 풍상을 겪어온 사람들도 남해인으로 명성이 높다.

따라서 남해군내에서도 설천면이 박사가 가장 많고 설천면 중에서도 특히 문항(文巷 )마을은 오
래전부터 박사마을로 불러져 왔다.

문항마을은 총 70여 가구에 185명이 살고 있는데 평균 7가구당 2명꼴인 16명이 국내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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