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Ⅲ)
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Ⅲ)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5.08 18:5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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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ㆍ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ㆍ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지난번에는 중국 종교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시간에는 중국 종교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대로부터 종교계에 있어 정교 불분(政敎不分)의 신도(神道)는 왕정위본의 인도로 전환되었으며, 새로운 예악의 발전은 원시종교로 대체되었다. 바로 종교적인 생활에서 예의적인 생활로 대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여기서 심령상 생명상의 공허를 느낀 나머지 따로 그 공허를 메우는 꾀를 추구했으니 바로 도교(道敎)의 발생을 가져온 것이다. 동한(東漢) 말년에 우길(于吉)에 의한 태평청령도(太平淸領道), 장능(張陵)에 의한 오두미교(五斗米敎), 혹칭 귀도(鬼道)에 제창에 이르러 도교가 비로소 하나의 종교성 단체를 이룩했지만 그 이전의 자연적인 발전과정과 그 원인은 이러했다.

첫째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편에 나오는 막고야지산의 신선에 대한 우화에서 인간연화를 먹지 않고 장생불로한다는 신선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되었다.

둘째, 이러한 구선(求仙) 사상은 발해(渤海) 연안에서 항상 신기루(蜃氣樓)의 기관을 볼 수 있고, 해상의 삼신산(三神山) 전설이 성행한 연·제(燕齊) 두 나라에서 인신확창시켰음이 도교의 발족에 박차를 더한 것이다.

셋째는 비록 예악의 발달로 쇠미했던 무격과 무술은 한(漢)조가 중국을 통일한 뒤 정신상의 미실과 공허를 구제받기 위하여 또다시 흥행했으니 민간에게 부주(符咒)의 법술을 촉염(觸染)시키게 되었다.

넷째로 진한(秦漢) 양대에 군출했던 방사(方士)들의 장생불로에 대한 추구의 기풍이 도교를 촉진했다. 진시황이 낭야방사(琅琊方士)의 말을 듣고 바다에 들어 신선과 불사의 약을 구했음을 비롯하여 한 무제(武帝)가 높은 누각을 짓고 신선을 구했다는 풍조 등이 이를 설명해 준다.

이상 네 가지 원인은 서로 각기 다른 입장에서 촉진되었다. 철학적인 입장으로는 노장학설에서, 종교적인 입장으로는 무격과 무술을 그리고 구선 사상에서, 미신적인 입장으로는 진한의 방사(方士)들에서 복잡하게 연원된 것이다.

이리하여 한말(韓末)에 이르러서는 모두 방사와 접근을 원하며 특별한 약이(藥餌)로 장생불로를 기도하는가 하면 무격과 왕래를 긴밀히 하면서 질병과 재앙의 위협을 축출하려 했다. 이런 노력이 어느 교주(敎主)를 중심하여 하나의 도당을 집성하고 그 가르침을 펴기에 힘을 모을 때 드디어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순제(順帝) 때 낭야(琅琊)땅, 우길(于吉)이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종지로 삼고 무격들의 잡론을 집성하여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를 저작하고 이에 무리를 모아 태평청령도로 발족했으니 이것이 도교운동의 효시였다. 그 뒤를 이어 풍읍(豐邑) 땅 장능(張陵)이 <도론(道論)> 24편을 저작하여 가르침을 폈거늘 그를 쫓을 자 쌀 닷말을 공납토록 했기에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 했다. 이들은 부수(符水)로 병을 고치고 노자의 도덕경을 읽히고, 칼과 도장 · 도공록(都功籙) 등으로 포교하는 법보(法寶)로 삼았으니, 이들 이른바 귀도(鬼道)는 그의 아들 장형(張衡)과 손자 장노(張魯), 그리고 증손자 장성(張盛)까지 포교를 거듭하다가 장성에 이르러 그 세력이 가장 흥성하여 그 무대를 강서성 귀계에 있는 용호산(龍虎山)으로 옮기고 장능은 천사(天師)로 추대하고, 장성은 스스로 교주가 되었다.

교의(敎義)는 정부와 민간에 깊이 침투하여 드디어는 노자의 무위자연을 숭법하는 상품(上品)과 수련과 약이(藥餌) 복용으로 장생불로를 추구하는 중품(中品), 그리고 부록(符籙)으로 재화를 막는 하품(下品) 등 세 가지 계층으로 나뉘어 사실상 예악(禮樂)화·사조(祀祖)화·민속(民俗)화된 신앙과 의식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도교에 혼합될이만큼 세력은 만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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