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압축하고 농축하라
시간을 압축하고 농축하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6.13 18:4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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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압축(壓縮·Compression): 눌러서 오그라뜨림. 물질 따위에 압력을 가하여 그 부피를 줄임. 축소·간결·요약, 농축(濃縮·Concentration): 액체를 진하게 또는 바짝 졸임. 어떤 물질의 농도가 높아지는 현상·집중이라고 그 의미를 국어사전에서 풀이하고 있다.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내용은 스탈린 시대의 강제수용소에서의 단 하루의 일로 한 권의 결코 만만치 않은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하게 된다. 단 하루의 삶일지라도 그것은 한 권의 소설 이상을 탄생시킬 만큼 그 뭔가로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오전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2시 반까지 하루가 채 안 되는 19시간여 동안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무대로 일어난 일들을 장장 800여 쪽에 25만여 단어로 담아낸 내용이다. 사실 말이 800여 쪽이지 그것은 영어 원본의 경우이고 ‘율리시스‘의 우리말 번역본은 해설을 포함해서 1300여 쪽이 넘는다. 정작 하루가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일을 묘사한 것인데 읽는 데는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아니 몇 달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어쩌면 읽다가 접어둔 채 평생 걸려도 읽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율리시스‘에 묘사된 그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한평생의 숙제요 존재할 이유이며 삶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 앞에선 묘한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김종건 전 고려대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 시절 원서강독 시간에 ‘율리시스’를 처음 만나 자신의 평생을 그 번역을 위해 바쳤다. 1968년 국내 최초로 ‘율리시스’를 번역한 김 교수는 20년 후인 1988년 다시 개정번역본을 냈고 또 한 해 모자란 20년 후인 2007년에 세 번째 번역본을 내놓았다. 번역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친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자신의 평생을 소설 ‘율리시스’에 묘사된 하루와 고스란히 맞바꾼 셈이다. 그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일들을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 각고의 노력으로 평생을 바쳤으니 말이다.

25만여 단어 이상의 사연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가 다시 뿜어낼 수 있는 하루의 힘, 그 하루의 저력은 무섭다 못해 위대하지 않은가. 그래서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는 매년 6월 16일을 ‘블룸스데이’라고 부르며 축제를 벌인다. ‘율리시스‘의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의 이름을 딴 ‘블룸스데이’엔 블룸이 거닌 길을 따라 걷거나 그가 먹은 음식을 똑같이 먹는 이벤트를 펼친다. 그리고 더블린의 공영방송에서는 아침부터 서른 시간에 걸쳐 ‘율리시스’를 낭독한다. ‘하루’, 즉 24시간=1,440분=86,400초는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것들의 은밀한 압축이요 농축인가. 우리역사에도 보면 ‘하루하루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의 애일(愛日)이라는 의미가 깊이 스며있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별당인 ‘애일당(愛日堂)’은 경북 안동 영지산자락에 있으며,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과 전남 장성과 이어지는 국도변 너브실에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13세손인 기세훈 초대 사법연수원장 등 후세들이 기거하던 300여 년 된 고택 안에도 ‘애일당’이 있으며,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외가 터인 강릉시 사천면 사천리 진리에 교산(蛟山)이란 나지막한 야산에도 ‘애일당’이 있었다고 한다. 허균의 호가 교산인 것도 여기서 연유한다.

진정한 ‘애일’, 곧 하루를 아끼고 사랑함은 과욕과 집착이 아닌 청빈과 비움에서 더욱 빛난다. 욕심 많은 이나 욕심 적은이나 모두에게 하루해의 길이는 같다. 하지만 그 하루에 무엇을 담아내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하루를 욕심으로 가득 채우면 삶은 나날이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하루하루 욕심을 덜면 삶은 맑아지고 향기를 피우며 아름다워지는 법! 그래서 욕심 없는 하루하루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 같다. 제아무리 민첩한 이라도 붙잡을 수는 없다. 제아무리 힘센 장사라도 세월 가는 것은 막아설 수도 없다. 절세의 미인도 가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잖은가.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시간을 압축하고 농축하는 ‘애일’을 얘기했는지 모른다.

예로부터 어른들이 하신 말씀이 있다. ‘분한 마음으로 하루해를 넘기지 말라!’ ‘촌음(寸陰:매우 짧은 시간)을 아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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