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 함양/박철기자
  • 승인 2016.06.21 19:19
  • 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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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함양지부장 정태화 시인

 
“채 정제되고 발효되지 않은 시를
찍어내듯 쏟아내는 시인이 넘치는 시대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떠내려가지 않는 정신을 시로 써야 합니다.”

지난 10일 함양시민연대 사무실에서 정태화(59) 시인을 만났다.
글 쓰는 일과 시민연대, 함양문인협회, 지리산문학회 등의 일로 늘 바쁜 그는, 몇 차례 인터뷰 요청을 물 먹인(?) 끝에 이날 감격의 조우를 허락했다.
그의 어눌한 말투와 한쪽 귀가 거의 귀머거리 수준인 기자의 난청을 애써 조화시키며 그와 대담하는 두 시간 남짓, 육신의 불편함이 오히려 명징한 철학과 영감 넘치는 예술을 낳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에 차올랐다. 그의 육신이 멀쩡했다면 저런 내공이 쌓였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자꾸 헬렌 켈러나 베토벤 등의 모습이 투영됐다.
명색이 국문학을 전공한 기자가 그의 문학이론에 압도당한 건 아니다. 다만 뜻밖에 육신의 멍에를 짊어지게 된 후 처절하게 초월과 극복을 추구한, 한 삶을 시에 오롯이 바친 그의 아우라에 사정없이 동화되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시에 대한 ‘평생불변심’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이거나, 내면으로부터의 처절한 탈출에서 세상을 향한 따뜻하고 안정된 시선을 갖게 되기까지 걸어온 그의 지난한 삶의 궤적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리라. 마치 정통 군사 이론으로 무장하고 전장에 나온 건방진 사관학교 출신 장교가, 야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선임하사에게 기가 꺾이는 이치처럼.

▲ 지난해 4월 11일 함양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정태화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내 사랑 물먹는 하마’ 출판기념회 모습
정 시인은 1994년 등단하고 첫 시집을 낸 후 21년 만인 지난해 3월 두 번째 시집을 냈다. 그의 시에는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 인간 한계와 극복에 대한 천착, 익숙함을 뒤집는 전위성, 이야기 등이 공존한다. 송용구(시인·문학평론가)는 그의 시를 ‘자연과 인간의 하나됨, 생명을 향한 사랑,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 최선의 인내, 초월과 극복의 의지, 근원적 본향을 향한 귀향의식’ 등으로 규정한다.
그는 자기의 두 시집에 대해 “1집은 서정적입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그리운 감정이 그대로 스며 있어요. 짝사랑을 많이 하던 때였지요. 해답이나 결과를 얻기보다 무작정 좋아서 사랑했어요. 그 사람이 그냥 좋았고,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가 떠나면 또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고…. 2집은 그에 비하면 이성적이죠. 1집 때 시가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대사에 머물렀다면 지금 시에는 이야기가 있어요. 한편 한편에 소설, 수필이 담겼죠. 감정을 절제하고 빌딩 짓듯이 서사를 넣었어요. 다만 극히 냉정해지다 보니 시 안에 나라는 사람이 개입돼 있는지 장담할 수가 없게 됐어요. 그래서 시가 좀 어려워졌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간 건방져진 느낌 땜에 마음에 안 듭니다”라고 자평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그의 삶은 좀 남다르지 않았을까?
“어릴 때 고모가 저를 안고 나오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면서 땅에 떨어져서 경기를 했는데,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어요. 이때부터 장애의 굴레를 안고 살게 됐죠.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어요. 어른들 누구나 들일로 바쁘다 보니 집에 거의 방치된 상태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가 군(대)에 있어서 애들 제대로 키워보겠다고 진주 가려다 저 때문에 발목이 잡혔어요. 공비토벌대 보급대장인데 산에 많이 살아 풍토병에 걸려 그게 악화돼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혼자 3형제 키우면서 어렵게 컸습니다. 늘 어머니는 시장 난전에, 형과 동생은 놀러 나가고 나 혼자 집에 있었죠. 그러면 이웃집에서 보리밥을 가져와 먹이고 챙겨줬습니다. 자기 자식들이 7남매라 먹이기도 급한데 나한테 나눠줘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지금까지 그 영향으로 이웃과 사람에 대한 정이나 사랑, 내가 어려워도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그의 시 저변에 흐르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의 수원지를 확인케 하는 대답이었다. 모든 것이 구족하지 않은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라는 난코스를 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그는 “글 쓰는 건 생각도 못했다”고 입을 뗐다.
“초등학교 특활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독서, 문예 같은 것뿐이었어요. 당시 담임이셨던 오일창(전 함양교육장) 선생님이 문예를 추천하셨어요. 거기다 4살 위 형님이 글을 썼는데, 중3 때 도 대회 나가 수상도 하고….”
할 수 있는 게 문예뿐인 절망적 상황에서 선생님과 형의 영향이 주어지자, 자연스럽게 시가 그의 모든 것이 됐다는 말이다. 더불어 그는 책에 몰두했던 유년의 추억을 이렇게 회상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정비석 번역본 삼국지를 다섯 번 읽었어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같은 거나 세계문학, 한국문학전집 같은 걸 많이 읽었죠. 저는 11살 때 입학했어요, 동생보다 늦게. 입학하고 나서는 등교할 때는 어머니가, 하교는 친구들이 (저를) 업고 다녔습니다. 특히 지금 서울대 교수를 하는 장경섭이란 친구가 도움을 많이 줬어요. 당시 초등학교 4학년 때 영어를 할 정도로 엘리트고 전교 학생회장도 하고, 중2 때 서울로 전학을 갔어요. 그 친구하고 둘이서 1~2등을 다투며, 공부밖에 몰랐어요. 그 친구뿐만 아니라 여러 친구들이 도움을 정말 많이 줬죠. 이때 친구들의 도움이 인생의 밑거름이 된 거 같아요. 중고등학교는 검정고시 공부를 했는데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하고 시험은 못 봤어요. 눈에 보이는 책은 다 읽었어요,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육신의 한계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가 책뿐이었던 소년의 꿈과 청춘의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정 시인은 첫 시집 이후 21년 만에야 2집을 냈는데, 공백이 오래간 이유가 뭘까?
“94년에 박재삼 선생님 추천으로 ‘시와 시인’ 신인상을 받고 곧바로 1집을 냈고, 작년에 2집을 냈죠. 시가 자꾸 배신을 때려서 오래 걸렸어요.(웃음) 써놓고 나면 아니다 싶고. 군불 때는 쓰레기책을 낼 수는 없어요. 형님이 말하길, ‘소설은 3만장, 시는 3000편 쓰고 나서 소설, 시 썼다고 얘기해라’ 이래요. 형님이 좋은 시를 싸그리 파기하는 걸 보고 ‘내가 좋다고 다 좋은 시는 아니구나’를 느꼈습니다. 문학은 처절하게 해야 합니다. 만족해서 시를 낸다기보다 살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 출판기념회 사인회
정 시인은 시를 쓰는 데 있어서 ‘기본’과 ‘소통’을 강조한다.
“시라 해서 언어와 문법이 아닌 건 아닙니다. (시도) 어디까지나 소통이고 소통의 기본은 문법이죠. 그걸 무시해서는 안 되죠. 또 시는 자기만족이다. 모든 문학이나 예술이 자기만족인데, 거기서 끝나면 가치가 없습니다. 그 가치를 살리는 건 공감이고, 더 나아가 감동으로 넘어가야 되거든요. 개인적인 것보다 보편적인 걸 써야 합니다. 그래야 나눔과 소통이 따르고, 시의 존재 가치는 여기 있어요. 상대방(독자)이 소통하고자 하는 걸 내가 가로막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시의 시작이 돼야 합니다.”

그는 시민연대 등 사회활동도 활발하다. 그에게 시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시민운동도 활발히 했고 기자로도 오래 근무했었어요. 문학인이 문학으로 끝나지 않고 왜 사회 활동을 하느냐? 나는 거기 올인하는 것보다 도움을 주는 정도에서 끝나고 있어요. 세상은 아픈 사람이 주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면, 만약 기자님이 위암에 걸렸다면 위를 살려내야 기자님이 삽니다. 철저하게 위를 사랑하고 아껴야 하죠. 그것이 아픈 곳입니다. 거기를 살리지 않으면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사회)현실은 세월호 같은 아픈 곳을 살리지 않고 미워해요. 그런 아픈 곳을 살리지 않으면 사회는 죽어갑니다. 세상에 버림받고 아픈 이들을 총력을 다해 사랑하고 살려내야지 그러지 않으면 사회와 나라가 죽고, 미래도 없어요. 그런데 문학은 적극적이지 않고 느리게 갑니다. 스스로 깨우쳐야 하니까. 운동가들은 빨리 갑니다. 그런데 내 재능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으니, 내가 이들에게 성의를 다해야 하고, 도움을 줄 수밖에 없고, 참여하는 겁니다.”

지역 주간지 편집부장으로 오래 근무했던 그는 지역 언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지역신문이 무언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어려운 이웃(‘불우이웃’을 ‘어려운 이웃’으로 그가 처음 썼다고 한다)의 좋은 일, 미담 같은 건 무조건 기사를 써줬어요. 경영자가 확고한 신념으로 지역을 바로잡겠다 하면 괜찮은데, (경험상)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근무 중에 느낀 건데, 저는 노동당원이었는데 내가 강성으로 나가면 그걸 기사화시키지 않고 이용해먹었어요. (기사 엿 바꿔먹기) 행태를 통해 정당한 기사가 반영이 안 되고. 그래도 기자 근무했던 것 고맙게 생각해요. 그동안 먹고살게 해줬으니까.(웃음)”

▲ 출판기념회 가족들과 기념촬영
그의 부인과 가족에 대해 묻자 그는 “내게는 세 명의 여자가 있다”며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먼저 나를 위해 오로지 헌신하며 산 어머니가 있고, 또 한 여자는 진짜 사랑했던 여자.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안 좋은 몸을 이끌고 필봉산 꼭대기를 1년에 몇 번씩 올랐어요. 몸이 건강해야 데이트도 하고 만날 수 있으니까 체력단련하려고.(웃음) 그녀 때문에 건강을 되찾고 살아났어요. 그 다음이 내 첫 시집 나온 거 보고 좋아서 무작정 보따리 싸들고 온 여자, 바로 지금 와이프죠. 갖고 있던 시집 500권을 먼저 화물로 보내놓고 무작정 들어와 살게 됐어요. 그러니 여자 세 명이 나를 살린 거죠.”
그는 ‘그 사이에 많은 여자가 있었고, 그래서 그는 바람둥이다!’라는 말을 꼭 넣어달라며 천진한 웃음을 터뜨린다. ‘초긍정’ 너털웃음을 곁들인 그의 소설보다 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듣다 보니, 건강한 몸과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위허위 살아가는 일상이 떠올라 낯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가면 불편한 몸 때문에 겪는 편견이나 일상의 불편들이 많지 않을까?
“젊을 때 식당에 들어가면 주인이 동전을 가져와 손에 건네주곤 했어요. 지금은 시대가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어요. 구석자리에다 밥 주고. 서울 명동거리에 나서면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요. 내가 거리에 서면 바닷길이 열리듯 명동길이 쫙- 갈라져요.(웃음) 그만큼 기피인물이란 거지. 그게 그때 장애인들의 현실이었어요. 감히! 어떻게 장애인이 거리에 나와?”

정 시인은 문인협회 함양지부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협회를 이끌고 있을까?
“글이란 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회원들이 자기만족에 머물고 있어요. 그걸 벗어나 독자들에게 인생의 전기를 만들어줄 수 있는 작품을 쓰기 바랍니다.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을 많이 만들고, 일단 (문단) 데뷔를 많이 해야지요. 데뷔에 대해서 너무 등한시하고 있는데 일단 데뷔를 해서 나름대로 좋은 글을 써갖고, 자기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남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쓰는 회원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취미활동에 머무르지 말고 전문가로서의 길을 걸어줬으면 하고, 그런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정 시인에게 꿈과 포부를 묻자 역시 시 이야기로 귀결된다.
“시가 너무 어려우니까 저는 시를 이야기 형식으로 쓰고 싶어요. 내 2집이 시와 이야기가 섞여 있는데 거기선 시 형식에 이야기를 실었어요. 앞으론 이야기 형식을 빌어서 시를 쓰고 싶어요. 한국시가 엄청 발전했는데 독자들이 잘 못 느끼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앞에 나서면 독자들의 호응이 높아질 겁니다. 제가 (그런 변화의) 선구자가 되고 싶어요. 저는 빛을 못 보게 되더라도 후대가 그 후광을 입을 겁니다. 한국시의 발전에 밑거름이 될 생각입니다.”

이 같은 그의 바람이 담겨 있고, 그가 대표작 또는 애착 가는 시로 꼽은 ‘안드로메다 부족을 위하여’를 감상해보자.

“소주병 모자를 벗기고 병나팔을 붑니다//고개를 쳐들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소리 하늘에 참새들 새 떼를 날아 올리는 그들, 뜨거운 태양 장기 안에 누군가인 그들이 불시착하고 있습니다//지상을 아주 잘 다스리시는 천체과학자 어른들께서 설명하시는 250만 년 전의 눈물이, 깊은 호수 고여 있는 소주병 모자를 벗기고 있는 시간//집 한 채 창문 하나씩 주먹 치는 바람소리들이 뛰쳐나와, 이곳 지구에도 극동의 하늘 한반도를 날아들고 있습니다//그대 지구의地球儀 수레바퀴 돌고 있는 눈동자 산산조각 부서진 파편, 지금으로부터 250만 년 전 시간을 떨어져 나온 가슴들이//밤하늘 별 바라기 눈동자에 쏟아져들고 있습니다.”

정 시인은 이 시 말미에다 “서기 2014년 3월 서부경남 일원에 안드로메다 베타성 유성우流星雨 부족이 불법이주민(으로) 정착해 왔습니다”라고 각주를 달았다. 이 시기는 전국에서 운석 낙하현상(파이어볼)이 관측된 후 다음 날부터 진주시 대곡면, 미천면 등지에서 운석 4개가 연이어 발견돼 전국을 운석 열풍으로 몸살하게 한 그 무렵이다. 유추해 보면 정 시인은 이를 모티브로 이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시에 대해 “우리는 모두 안드로메다에서 왔는지도 모릅니다.”라며 창작 배경을 설명한다.
“안드로메다는 250만 년 후에 지구 가까이 온다는 은하입니다. ‘우리 모두는 거기서 별똥별 쏟아지는 가운데서 온 부족들’이라는 가정으로 쓴 작품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를 바탕으로), 오랜 우리 선조들이 거기서 전쟁이 일어나서 후손들에게 안전한 지구에 가서 살아라 하고 보냈을 거고. 250만 년이란 시간에 걸쳐서 찾아오려면 아주 간절한 마음이 아니면 어렵겠죠. 유성우는 은하가 통째로 지구로 찾아오고 있다 하는 소식을 전하러 온 선발대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쓴 시입니다. 겉으로는 마치 SF영화 같은 황당한 이야기 형식이지만, 내면에는 끊을 수 없는 그리움이나 잊지 못할 사랑, 그런(것이 깔려 있습니다).”
그의 설명을 듣자 ‘시에 이야기를 담는다’는 그의 말이 그제서야 가슴에 다가왔다. “‘안드로메다’라는 잃어버린 핏줄에 대한 그리움, 사랑이 250만 년을 관통해서 오고 있다”는 그로테스크할 수 있는 가정을 바탕에 깔고, 그 안드로메다에게 ‘인간은 사랑과 그리움의 존재’라는 메타포를 짊어지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야기 형식을 원용해 전위적인 대상에게 인간 보편적인 감정을 노래하게 한 거다. 참으로 절묘한 형상화가 아닌가?
정 시인의 시에 대한 열정과 두터운 내공을 접하자, 세파에 휩쓸리며 팍팍해진 감성 덕분에 떠오르지 않는 건망증이 돼버린 ‘만년 문청’의 열정이 가슴속에서 꿈틀꿈틀 기지개를 켜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선물 받은 그의 시집을 자꾸 들추게 되는 것이었다.  함양/박철기자

■정태화 시인은
△본명 정경화 △함양 출생 △1994년 계간 ‘시와 시인’ 신인상으로 등단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선인장꽃은 가시를 내밀고 있다’(1995·도서출판 청학), ‘내 사랑 물 먹는 하마’(2015·시산맥사) △한국시인협회, 지리산문학회원, 한국문인협회 함양지부장 △(전) 함양군 민주평통 자문위원, 경남도민일보 칼럼위원, 함양신문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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