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벌 명 당
(6)벌 명 당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6.0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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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 명 당   


 봉요처(蜂腰處)는 과협(過峽)의 한 종류로 벌의 허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벌명당과 관련된 곳을 살펴보면, 전남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 양류도수혈 벌명당 반남 박씨 시조 박응주(朴應珠)선생의 묘소(조선 8대 명당)와 전북 완주군 이서면 이문리 용수산 벌명당 진주 소씨(발산 소씨) 묘소, 충북 청원군 이류면 금곡리 쇠실 마을 뒤편에 청풍김씨 김관(金灌)의 부인 박(朴)씨의 묘소는 하나같이 자리를 잡아준 지관이 천기누설로 벌에게 쏘여죽었다는 비슷한 내용의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또한,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에 자리 잡은 법흥사 적멸보궁 터와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37번지에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선생의 묘소, 경남 함양군 마리면 초동리 산1-2번지에 거창(居昌) 신(愼)씨 도은(道隱) 신인도(愼仁道)선생의 묘소는 봉요처(蜂腰處)로서의 벌 명당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에 있는 거창(居昌) 신(愼)씨 벌명당을 살펴보면 진주에서 국도 3호선을 따라 올라가면 함양군 안의면 금천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봉산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고개 마루가 나타난다. 고개 넘어서 좌회전하면  박동마을이다. 마을 앞에 덕산 마을이라는 이정표가 입석으로 서 있고 이정표를 따라  봉산제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가다보면 전형적인 산촌마을이 나타난다. 소박하고 아주 평화스러워 보이는 이 마을은 양명한 지역으로 관쇄(關鎖)가 주밀하게 잘 되어 있으며 또한 장풍도 잘되어 있다.  

마을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벌명당이 소재해 있고 옆에 봉산제가 자리 잡고 있다. 벌명당의 주요 혈처에는 거창(居昌) 신(愼)씨 12세 가정대부 검교한성부윤 증직 정헌대부 호조판서 도은(道隱) 인도(仁道) 선생의 묘소이다. 도은(道隱) 묘소 바로 앞에는 17세 선교랑 희문(希文)공과 배위 의령(宜寧)남(南)씨의 합폄(合窆)이고, 봉요처 뒤쪽 위에서부터 17세 여절교위 우평(友平)공과 배위 거창(居昌) 유(劉)씨로 합폄(合窆)되어 있다. 그 밑에는 17세 승훈랑 우맹(友孟)공과 배위 초계(草溪) 정(鄭)씨의 묘소로 상하로 점혈되어 있고, 바로 밑에는 승훈랑의 장자 18세 선교랑 락수(樂水) 권(權)공과 배위 은진(恩津) 임(林)씨의 묘소이다.    

▲ 벌명당 판서공 인도(仁道) 분영도(墳塋圖)
▲ 판서공 도은(道隱) 신인도(愼仁道)선생묘소

















 
벌명당의 국세(局勢)는 나름대로 잘 짜여진 국세(局勢)로서 팔을 벌려 유정하게 환포 하였고 관쇄(關鎖)또한 주밀하게 잘돼 있다.
 혈장 역시 평탄 원만하며 어느 한 곳 흠 잡을 데 없는 곳으로 귀성, 요성, 관성 두루 갖추었고 혈의 사형(四形)으로 보면 장유(長乳)혈로 명당임에는 분명하다.
 특히 입수부분이 둥그런 금체(金體)로 형성되어 양명하여 귀(貴)와 지(智)를 주관함에 모자람이 없고 더욱이 뒤에 귀성(鬼星)이 밀어주어 금상첨화로 길하다 하겠다.
 전순 또한 넉넉하고 관성(官星)이 양쪽에 받치고 있어 인(仁), 의(義) 지(智), 예(禮)를  갈무리하기에 충분하며 또한 선익이 잘 형성되어 혈장을 보호하고 있다.

 입수처에서 들어오는 봉분 위쪽에 어병사 처럼 생긴 원석이 띠를 두르듯 둥그렇게 박혀있다. 이를 보고 해목혈(蟹目穴)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불만인 것은 용맥(龍脈)에 있다.
 뒤쪽 산맥에서 혈처로 들어오는 잘록한 부분을 봉요처(蜂腰處)라고 하며, 그래서 벌명당이라고 불리고 있다. 봉요처는 끊어질 듯 잘록하여도 절대로 끊어져서는 안 된다.  이곳은 봉요처라 하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점혈할 당시는 봉요처일지라도 지금에 와서는 뒤쪽 용맥과 바로 연결되지 못하고 옆구리에서 붙어온 맥으로서 봉요처라 할 수 없다. 600여년의 긴 세월에 강산이 변하여 지금 상태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는 위쪽 묘지의 청룡(靑龍)에서 붙어온 방맥(傍脈)의 일종이다. 완벽한 혈처야 없겠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거창(居昌) 신(愼)씨 세보(世譜)와 봉산제 중수 기념비에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으로 기록되어 있고, 어느 곳에도 벌명당이라는 기록은 없다.

 도은(道隱) 인도(仁道)선생 이후 대과 급제 34명, 관찰사 8명, 판서 열여섯 분, 영상 세분, 왕후 두 분을 배출한 명문가로 발전  한 것이 이 터와 무관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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