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속에 빛난 절개
고문 속에 빛난 절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6.27 18:5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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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우리역사에서 심각한 고문을 당했지만 그 고문을 통해 절개를 더욱 빛낸 이들이 여럿 있지만 대표적인 인물이 사육신과·삼학사·박태보·김구 선생이다. 사육신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이른다. 그들은 단종의 자리를 뺏은 수양대군을 밀어내고 단종을 복위시킬 것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결국 죽은 사람들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이들은 이른바 삼학사이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바로 이들인데, 이들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중국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온갖 협박과 고문과 회유를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아서 끝내 중국 선양성 사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남한산성 한쪽 기슭에 있는 현절사에 이들 세 학사의 위폐가 모셔져있다.

박태보는 숙종 때 간관(諫官)으로 있을 때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국문을 받고 목숨을 바쳐 죽기까지 하였다는 면에서 이들과 한 맥락 속에서 평가된다. “전하께서 신(臣)을 죽이시려거든 머리를 바로 베십시오. 누가 감히 말리겠습니까. 받기 어려운 자백을 왜 꼭 받으려고만 하십니까. 신의 머리는 베실 수 있지만 자백은 받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신을 협박하시어 참람한 형벌로 자백을 받은 후 그치고자 하시나, 신이 어찌 감히 밝은 임금을 속여 거짓으로 자백을 하겠습니까. 엄한 형벌을 못 견디어 거짓으로 자백을 하고 저승에 돌아간다면 저승 사람들이 틀림없이 신을 보고 비웃으며 ‘저 사람은 형벌을 못 견뎌 거짓 자백을 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이 그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서럽습니다. 상소로 임금의 허물을 간하는 것은 신하의 마땅한 분수와 의리입니다. 전하의 오늘의 행동이 성덕에 크게 누가 되어 반드시 망국의 주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박태보가 형벌을 받는 소리를 듣고 궁궐문 밖에서는 “아까운 사람이 맞는구나. 충신이 죽는 도다”라는 소리가 들렸으며 오촌 조카 박필순은 “착하시도다. 우리 숙부여! 죽음에 임하여서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니 군자이십니다. 이번 일은 천하 후세에 전할 것입니다”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평소 박태보 집안과 서로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송시열도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의 원자 책봉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도중 박태보의 전말을 듣고 “대단하다 대단해! 그 덕분에 인륜과 기강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도다.”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공식 역사 기록이기 때문에 사실만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관은 몇몇 기사 끝에 평을 덧붙일 수 있었다. ‘인현왕후를 폐위하는 문제에 대해 박태보 등 86명이 연명으로 폐위의 부당함을 올린 상소를 본 숙종은 매우 노하여 그날 밤에 바로 친히 국문을 하는데, 이때의 상황을 적은 실록 기사 끝에 사관은 이런 평을 적었다. 뼈가 으스러졌지만 박태보는 임금의 노여움이 더 심해질수록 응대는 더욱 평온했고, 형벌이 혹독해질수록 정신이 선명하였으니, 진실로 절개 있는 선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옆에서 모시고 있던 신하들은 모두 재상이나 대간이었는데도 임금의 노여움이 두려워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니, 이런 사람들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고 적고 있다. 이로부터 6년째 되는 해 숙종은 크게 뉘우치고 퇴출했던 인현왕후를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박태보를 충신으로 추증(자헌대부 이조판서)하게 되었으며 경종 3년(1723)에는 ‘문열(文烈)’이라는 시호(諡號)를 받고 영의정으로 추증되기도 했다.

백범 김구선생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원수를 갚겠다고 황해도에서 일본 군인을 살해한 죄로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후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주리를 트는 고문을 당하는 등 모진 고통을 겪었으나 재판정에서 선생은 일본인 재판관을 향해 호령하면서 그들이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국모를 죽인 죄 등을 꾸짖을 뿐이었다. 결국 사형을 선고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옥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형을 앞둔 자신이 동요하지 않았던 것은 박태보와 삼학사를 생각하며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냈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하고 있다.

국가적인 위기에 어떻게 처신할지 고민하는 게 어찌 숙종 때만의 일이겠는가?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면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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