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Ⅸ)
칼럼-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8.07 18:3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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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ㆍ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ㆍ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ㆍ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ㆍ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Ⅸ)


지난번에 이어 중국 종교의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남종(南宗)의 왕유(王維)를 비롯해, 송대의 동원(董源) ․ 미불(米芾), 원대의 예찬·황공망, 명대의 동기창(董其昌) 등에 계승된 청담한 문인화풍은 모두 불교를 독신한 나머지 산수나 설경·불상 등을 그렸었고, 높이 1천 자나 되는 영령사(永寧寺)의 구층부도는 불교건축의 대표가 되었다.

문학에 있어서는 이론과 창작에 모두 깊이 영향이 스며 있다.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문학 이론사상 최고의 지침서인 주옹(周顒)의 <사성절운(四聲切韻)>, 심약(沈約)의 <사성보(四聲譜)> 등은 인도의 병음(拼音)에서 계시받아 반절(反切)로써 자음을 분석했고, 불경을 전독하다가 사성(四聲)을 분류케 되었으며, 송명(宋明)대에 유행했던 이학(理學)의 어록체(語錄體) 또한 선종(禪宗) 어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창작면으로는 위진 시대에 사영운(謝靈運)의 산수문학, 도연명(陶淵明)의 전원문학 속엔 모두 망아(忘我) ․ 무아(無我)의 경계로서 불교사상의 최고 표현임은 그들이 불교를 독신한 데서 나왔고, 사조(謝朓)·심약, 왕유, 맹호연(孟浩然)·유종원(柳宗元) 등도 불가시인(佛家詩人)으로 꼽혔으며, <서유기(西遊記)>ㆍ<봉신전(封信傳)> 등 지괴(志怪)소설에서도 불교의 영향을 살필 수 있었다.

한편 운문과 산문의 혼합 체재인 불교의 변문(變文)은 직접 민간시가인 보권(寶卷)과 탄사(彈詞), 그리고 창백(唱白)을 겸용한 희곡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학문사상 방면으론 첫째, 정·주·육·왕 등의 송명 유학에게서 뚜렷하다. 선종의 지심견성(指心見性)·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설은 육·왕의 심학(心學)에게, 불가의 계율은 성리학의 예악(禮樂)에게, ‘돈(頓)’·‘점(漸)’설의 대립은 이학 중의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의 분쟁에, 불가의 청정(淸淨)은 이학의 거욕(去慾)에, 혹은 천태종(天台宗)의 지관(止觀)은 도학파의 명(明)과 정(靜)에게, 다시 불가의 허무적멸의 본체론은 주돈이 등 도학파의 적연이성(寂然而誠)의 본체론에 각각 영향을 준 바 있다.

사회적으로 끼친 영향은 위와 같은 업적에 상대적인 것이다. 본래의 유교가 사회를 구제하는 정열에 불탔다면, 불교는 정(靜)적인 내면세계의 지향으로 현실의 유리, 급기야는 중국 전통사회의 정체를 초래한 것이다. 심산계곡에서 적멸이나 기다리는 창백한 지성인을 너무도 많이 배출한 것이다.

□기독교(基督敎)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한 것은 당 태종 정관 9년(635) 기독교의 전도사가 장안(長安)에 들어와 경사의령방에다 대진사(大秦寺)를 세우고 전도한 데서 비롯된다. 이를 당대엔 대진경교(大秦京敎)라 불렀는데, 당 고종 때엔 전국에 경사(景寺)를 지어 전도토록 했다.

경교는 당 무종 때 도교의 득세 때문에 중국 대륙에서는 거의 실전되었지만 몽고지방에서는 명맥을 유지하던 중 원 태조가 십자군 전쟁을 맞은 로마 교황에게 원조를 베풀게 되자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몽고는 중국에 있어 기독교의 부흥기지였다. 몽고인이 내륙에 진출하면서 기독교도 따라 진출했고, 그 뒤를 따라 세조 지원 17년(1280)에는 로마 교황이 사절을 중국에 보내 왔고, 1294년에는 로마 교황에게 전도사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다 성당을 건립했고, 신도도 6천여 명에 달했으니 경교의 기초작업이 끝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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