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씨춘추'와 '국어'의 진실
'좌씨춘추'와 '국어'의 진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2.1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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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웅/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
지리산 막걸리 학교 교장
‘사기’의 ‘태사공자서’에 말하기를 “좌구명은 실명(失明)하여 ‘국어’를 저술하였다”고 하였고 ‘오제본기’에서 “나는 ‘춘추와 ‘국어’를 보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사마천이 직접 보고 자료로 의거한 것은 ‘좌씨전’은 없고 다만 ‘춘추’와 ‘국어’였던 것 같다. 그런데 ‘사기’의 각 편에는 금본 ‘좌전’에서 인용한 글이 심히 많은 데 비하여 금본 ‘국어’에서 인용한 글은 매우 적다.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즉, 사마천이 본 ‘국어’가 금본 ‘국어’인가 아닌가. 또 ‘사기’가 인용한 ‘좌전’의 글들은 사마천이 본 ‘국어’에도 포함되어 있었던가 없었던가. 다시 말해서 ‘좌전’과 ‘국어’는 한 책이냐 그렇지 않으면 별개의 두 책이냐 하는 문제이다.

위소(葦昭)의 ‘국어해(國語解)’의 서(敍)에서는 “좌구명은……주(周)의 목왕(穆王) 때의 일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노의 도공(悼公)때에 조양자(趙襄子)가 지백(智伯)을 죽인 일까지 채록하였으니 이것이 ‘국어’의 내용이다. 그 글이 경(공자의 ‘춘추’)에 근거를 두지 않았으므로 ‘외전’(外傳)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것은 후한 때 사람의 설이다. 생각건대 ‘좌전’을 ‘내전’이라고 하는데 대비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금본 ‘국어’의 내용은 크게 이상한 점이 있으니 그 연대로 말하면 물론 춘추시대를 중심으로 하였고 공자의 ‘춘추’와 시대가 대체로 병행되고 있으나 그 중에 은공 원년에서 애공 14년까지의 240년간의 일을 기록한 것은 극히 적다. 이는 극히 주요한 부분을 생략한 것이 된다.

한편 금본 ‘춘추’를 보면 역시 크게 이상한 점이 있다. 즉, 이미 ‘춘추’를 해석한다고 한 이상 마땅히 ‘춘추’와 같이 은공 원년으로부터 애공 14년을 그 처음과 끝의 기한으로 삼아야 할 것이어늘 ‘좌전’은 발단으로서 “혜공의 원비(元妃)는 맹자(孟子)이다. 맹자가 졸하자 그의 질제인 성자(聲子)를 후실로 삼아 은공을 낳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인즉 은공 이전의 일로서 은공이 후에 중자(仲子) 소생의 자기의 아우인 환공(桓公)을 대신하여 섭정한 일의 직접적인 복선이 되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득불 지나간 일을 추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거니와 환공 2년조의 “진(晋)의 목후부인(穆候夫人) 강씨가 조(條) 땅의 전역(戰役)에서 태자를 낳으니 구(仇)라고 이름지었다”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 일은 춘추시대의 수십 년 전의 일로서 ‘경’ 가운데에서는 그 일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다. ‘경’을 해석한다고 하면서 자세하게 이런 일을 쓴 것은 어찌된 일인가. ‘경’(‘춘추’)을 해석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일을 자세히 쓰고 있는 것은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금본 ‘국어’와 금본 ‘춘추’는 만일 별개의 두 책이라고 한다면 두 책의 체례가 함께 혼란을 면치 못할 뿐만 아니라 저작다운 저작이라고 할 수 없고, 만일 합쳐서 한 책이라고 본다면 서주(西周)말, 동주 초의 300여 년간의 훌륭한 역사서가 되는 것이다. 그 역사서는 본명이 ‘국어’이며 또 혹시 ‘좌씨춘추’라고도 불렸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좌씨춘추’는 ‘안자춘추’·‘여씨춘추(呂氏春秋)’와 같이 순전히 하나의 독립된 저술이며 공자의 ‘춘추’와 절대로 주종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좌씨춘추’가 ‘춘추좌씨전’으로 변한 것은 유흠의 소위 ‘인전석경(引傳釋經)’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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