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재빠름(敏)에 대하여
아침을열며-재빠름(敏)에 대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8.17 19:1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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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재빠름(敏)에 대하여



너무나 유명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지 모르겠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빨리 배우는 말 중의 하나가 “빨리빨리”라고 한다. 이것은 때로 긍정적인 의미에서도, 부정적인 의미에서도, 화제가 된다. 나도 이 양면을 고스란히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확실히 우리는 성질이 급해 뭐든 당장에 해내지 않으면 그 시간적 ‘지연’을 잘 참아내지 못한다. 북한에서 좋아하는 이른바 ‘속도전’도 그런 민족적 특성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 남한이 전쟁의 폐허에서 이토록 빨리 경제적 풍요를 실현한 것도 역시 그런 면모의 일부일 것이다. 빨리 해치운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나도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당장에’ 해결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으니 전형적인 한국인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특별히 화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래서 아주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저 위대한 공자도 실은 이 비슷한 경향 내지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 점을 높이 산다.

{논어}에 보면,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0114 “君子 … 敏於事而愼於言…, 0424 子曰, “君子欲…敏於行”, 0515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0720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1705 “能行五者於天下爲仁矣” … “恭寬信敏惠. 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敏則有功, 惠則足以使人”, (그의 영향인지 제자들도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런 취지로 말하기도 한다)

‘일에는 재빠르고…’ ‘행함에는 재빠르고…’ ‘재빠르게 배우고…’ ‘재빠르게 추구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재빠름…을 능히 천하에 행하면 인이 이루어진다…, 재빠르면 공이[좋은 결과가] 있다…’고까지 말했으니 이게 공자의 가치 중 하나가 아니었다고는 말 못하리라.

나는 공자를 읽을 때 늘 생각해본다. 이 양반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저 잘난 척 ‘꼰대질’을 하기 위해서 한 말은 절대 아니다. 다른 말들이 거의 다 그렇듯이 그의 말에는 ‘실제로 그렇지 못한 문제적 현실’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니까 공자의 눈앞에는 ‘재빠르지 못한’ ‘불민한’ 사람들이 널려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그것이 안타까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이렇게 그에게 ‘해석학적 이해’를 시도해 본다. 이른바 가다머식 ‘지평의 융합’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해석자인 나의 지평에도 그런 현상은 엄존한다. 우리의 현실에는 바람직한 의미에서의 ‘재빠름’, ‘민첩함’이 답답할 정도로 결여돼 있다. (여기에는 ‘명민함’이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문제를 재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인식하고, 재빨리 그리고 명민하게 대처하여 해결해 나가야 함에도 도통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나는 이런 답답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우선 몇 가지만 짚어보자. 대학의 구조조정이 그렇다. 출생률 저하로 입학 자원은 줄어드는데, 그나마 입학해서 졸업을 해도 취직도 제대로 못하는데, 이런 게 뻔히 눈에 보인지가 십년도 훨씬 더 지났는데 아직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이를테면 통합을 통한 재조정이 불가피한데 이해당사자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문제를 깔고 앉은 채 세월만 보내고 있다. 환경문제도 그렇다. 수질오염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젠 소위 미세먼지로 숨도 제대로 못 쉬는데, 사람들이 속으로 골병이 들어가건 말건 정치인들도 관료들도 거의 오불관언이다. 공장과 발전소와 자동차가 문제라는 진단이 나왔다면 온갖 정책수단을 총동원해서 연료를 친환경으로 대체해나가야 하건만, 오늘도 서울하늘은 여전히 희뿌옇다. 또 내가 사는 동네엔 조그만 샛강이 흐르는데 이 강으로 저쪽 동네와 이쪽 동네가 완전히 단절돼 있다. 여기에 작은 보행교 하나만 놓아도 양쪽 주민의 생활이 크게 향상될 텐데, 아무리 건의를 해도 십 수 년간 말만 무성한 채 한 발짝도 진전이 없다. 또 수백만 인구의 편의를 위해 KTX의 강남 정차가 절실한 데도 무슨 연유인지 정책건의는 번번이 묵살되고 만다. (대개는 보이지 않는 사적 이해가 공적 이익을 덮어버린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런 사례들에서 명민함과 민첩함은 찾아볼 수 없다. “아아, 그대 ‘민’자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좀 과장 하자면 그런 심정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재빠름만이 능사는 아니다. 우리는 대책없는 ‘빨리빨리’가 나은 병폐를 너무나도 뼈아프게 체험한 전례가 있다. 저 ‘와우아파트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가 그렇고, 빈대떡 뒤집듯이 뒤집어온 입시제도의 변경이 그렇다. (‘빨리빨리’는 ‘대충대충’과 짝을 이룬다) 문제가 생기면 ‘재빨리’ 그럴듯한 방편으로 면피한다. 그리고 문제는 금방 잊혀진다. 후딱후딱 만들어놓는 거기엔 ‘명민함’이 결여돼 있다. 그런 건 절대 제대로 된 ‘재빠름’이 아니다.

우리가 재빨라야 하는 것은 그 일 자체의 중요성에 기인한다. 정작 중요한 일들은 결코 미적거려서도 안 되고 더욱이 미루어서도 안 된다. 깔아뭉개서는 더욱 안 된다. 그런 일들은 지금도 우리 앞에 산적해 있다. 모두가 당장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모두가 당장 그것에 달려들어 해결해야만 하건만 그런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 공자가 우리의 이런 현실을 본다면 아마 그의 입에서 곧바로 저 단골 발언이 튀어나올 게 틀림없다. “已矣乎!”(다 끝났구나!) ‘이렇게 아파도 아픈 줄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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