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아가씨’ 백영호 작곡가를 기억해 주세요
‘동백아가씨’ 백영호 작곡가를 기억해 주세요
  • 글/김상목·사진/이용규기자
  • 승인 2016.08.25 18:49
  • 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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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호 기념관 백경권 관장<백영호씨 아들·진주 서울내과 병원장>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동백아가씨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자씨를 떠올리지만 이 곡을 작곡한 백영호 선생이 있었기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곡이다. 대한민국 작곡가 중 최다곡을 보유한 백 선생은 1920년 부산에서 태어나 5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부산에서 혈혈단신으로 서울로 상경해 ‘동백아가씨’를 발표하면서 당시로서는 경의적인 기록인 1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승승장구하던 백 선생은 동백아가씨가  발매 2년만에 금지곡으로 선정되는 등 주위의 질투와 견제를 많이 받은 작곡가이기도 하다. 백 선생의 업적을 추모하고 여러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큰 아들 백영호 원장은 본인의 병원인 서울내과 한켠에 아버지의 기념관을 만들고 아버지의 대표곡들을 CD로 제작해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아버지를 추억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아버지를 위한 성지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백 원장을 소개한다.
 

다음은 백 원장과의 일문일답.

-백영호 기념관은 언제 개관했나
▲1997년 병원이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아버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관을 만들게 됐다. 지금까지 4번의 리모델링을 거쳐서 외지에서도 많이 방문하시고 병원 손님들도 병원 한켠에 음악이 흐르니 많이들 좋아하신다.

▲ 백경권 원장이 운영하는 진주 서울내과병원 내 백영호 기념관
-기념관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
▲아버지가 생전에 제작하신 LP레코드, 사진, 각종 수상트로피 등이 전시되어 있고 피아노 있어 아버지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올해 저작권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것은 아버지가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았다는걸 의미한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백 원장은 백영호 선생을 어떤 아버지로 기억하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엄하면서도 따뜻했고 작곡가로서는 재능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노력파 음악인 이었다. 정규 음악공부를 하지 않았고 지방 작곡가로 활동하다가 경쟁이 치열한 서울로 올라가 인맥, 학연, 지연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해서 동백아가씨를 비롯한 많은 히트곡을 작곡하여 최고의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그러다보니 주위에서 질투와 견제를 많이 받았지만 아랑곳 없이 자신만의 길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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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내 ‘백영호 기념관’ 개관 운영
레코드 전시 등 방문객 즐거움 선사
   
동백아가씨·추억의 소야곡 등 작곡
올해 저작권협회 명예의 전당 헌정

오는 2020년 탄신100주년 음악회 등
아버지 추모사업 힘 닿는데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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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저작권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백영호 작곡가 젊은시절 모습
-백영호 선생의 발자취는
▲1920년 부산에서 태어나서 1940년에 일본군에 징병으로 끌려가서 만주에서 근무하셨다. 만주서 탈영하셔서 내몽고에서 음악을 하다가 해방 후 다시 국내로 돌아와서 연주 음악활동을 하셨다. 당시에는 작곡가가 아니라 기타를 치는 음악인이셨는데 6·25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이 피난처가 되면서 여러 음악가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작곡에 눈을 뜨기 시작하셨다. 부산 미도파레코드사에서 활동하시면서 마음의 자유천지, 추억의 소야곡, 해운대엘레지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던 중 전쟁이 끝나고 지방에서 활동 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1963년도에 서울로 상경하셨다. 서울로 올라가서 유명한 음악가들과 경쟁을 하면서 동백아가씨 등의 히트 곡을 발표하여 유명작곡가 반열에 오르셨다.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이 된 이유
▲동백아가씨 LP 판이 100만장이상 판매되자 아버지를 견제하지 않으면 타 레코드사들이 생존에 위협을 느낄 정도라 어떤 식으로든 상승세를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그러나 동백아가씨가 표절도 아니었고 특별한 핑계가 없으니 왜색이 짙다는 명목으로 발매 2년 만에 금지됐고 21년 만에 해금이 되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음악을 배우신 분도 아니었고 동백아가씨는 요즘 젊은이들도 노래 몇 소절 정도는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한국적인 음악감성이 담긴 명곡이다.

▲ 산청 찔레꽃 음악회에서 백경권 원장의 피아노 반주로 장사익 선생이 동백아가씨를 부르고 있다.
-소리꾼 장사익 선생과의 인연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인 장사익 선생이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을 때 동백아가씨의 리메이크 허락을 받으러 찾아왔었다. 그때 장사익 선생 특유의 구성지고 구슬픈 소리로 부르자 아버지도 흔쾌히 승낙하셨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사익 선생은 자신의 가수 생활 중 제일 큰 인연이라고 말씀하신다. 장사익 선생께서 동백아가씨를 잘 불러주었기 때문에 동백아가씨가 더 오랫동안 사랑받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도 장선익 선생은 무대에서 동백아가씨를 마지막 곡으로 부르면서 청중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백영호 선생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곡을 발표한 작곡가로 알고 있는데 총 몇 곡인가
▲미 발표곡 까지 포함하면 4000여곡 된다. 아버지가 특히 영화주제가를 많이 만드셨다. 당시 “백영호가 영화주제가를 잘만든다”고 소문이 나서 거의 독식하다 싶이 하셨고 영화주제가 LP판 하나에 12곡이 삽입되어야 하니까 특히 다작을 하신 계기가 된 것 같다.

-2020년 백영호 선생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만든다고 들었는데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는 여러분들과 의논중이다. 행사를 하게 되면 서울이나 고향 부산이 일순위이지만 진주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 진주에서 탄생한 남인수의 추억의 소야곡이 아버지가 작곡가로서 대성할 수 있는 주춧돌이 된 큰 의미 있는 노래이다. 처가도 진주 인근의 삼천포이고 장남이 진주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으며 기념관도 진주에 있으니 진주가 제2의 고향이라 할정도로 진주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부친의 생전의 육성인터뷰에서도 이 부분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대중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나
▲아버지는 훌륭한 천재작곡가이면서도 엄청나게 노력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만든 노래는 분위기를 바꾸면 전혀 새로운 노래로 재탄생한다. 먼 훗날까지도 부친의 작품들이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또 동백아가씨 하면 이미자씨를 떠올리는데 작곡한 사람은 잊혀 지고 부른 사람만 기억되니 많이 안타깝다. 백영호의 동백아가씨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베토벤의 운명 같은 곡도 몇백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듣듯이 동백아가씨도 몇백년이 지나도 사랑받는 노래가 됐으면 한다.

-아버지를 따라 음악을 하지 않고 의사가 된 이유는
▲과거 윤양병원의 김윤양박사님이 외가 친적이시다. 외가쪽에 의사가 많아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음악을 했으면 하셨는데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고 의사의 길로 가는 것을 막지는 않으셨다. 아버지 육성 회고록에 보면 “아들이 3명인데 한명은 건축가, 의사, 경제전문가인데 각자 전문직으로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조금 아쉽다”는 말씀은 하셨다.

▲ 백경권 원장은 백영호 기념관을 찾은 손님들을 위해 직접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한다.
-추모사업을 추진하면서 아쉬운 점은
▲아버지 추모사업을 하면서 많은 보람을 갖지만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깝고 빠른 시간 내에 부산이나 진주 등 의미 있는 곳에 아버지 성지가 만들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계획
▲2020년 탄신100주년을 맞이하여 아버지 업적을 추모하고 알리는 일을 계속 할 생각이며 진주 시민 여러분들의 성원을 부탁드린다. 글/김상목·사진/이용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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