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Ⅹ)
칼럼-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Ⅹ)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8.28 18:4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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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중국(中國)의 종교(宗敎)(Ⅹ)


지난번에 이어 중국 종교의 세부적인 내용(기독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당초(唐初)에서 원대까지를 기독교 전파의 제 1기로 친다면,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내화한 명 신종(神宗) 만력 8년(1580)에서 예수회가 해산되기까지 190년 동안을 2기로 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명대에 이르자 도교나 불교가 약화되고 회교마저 위축되었다. 마침 서양에선 종교개혁이 일어나 혁신파인 신파 기독교(즉 예수교)는 로마 교황의 통치를 벗어나 종교 의식을 간소화함을 제창했고, 구파인 천주교는 정통파임을 강조했을 무렵이다.

천주교 중 일부 인사가 ‘예수회’를 조직하여 대외 전도를 강화함으로써 활력을 넣으려던 때 마테오 리치가 마카오를 천주교 전도의 기지로 삼고 건너왔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의 반발을 우려한 나머지 서양의 과학 도구를 곁들여 왔다. 이때를 즈음하여 중국 성교삼걸(聖敎三傑)이랄 수 있는 서광계(徐光啟)·이지조(李之藻)·양정균(楊廷筠) 등이 천주고의 기둥이 되어 합력했기에 드디어는 중국 상류사회의 지지를 받았으나, 명 신종 때와 청 성조 때 두 차례에 걸쳐 배격을 받기도 하였다. 더구나 강희 8년(1669)에서 강희 말년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천주교 배척정책과 건륭(乾隆) 시대의 천주교 억제정령으로 천주교 전파가 중단되었다가 함풍(咸豐) 8년(1858)의 천진조약으로 다시금 전도가 부활된 것이다.

신파 기독교인 예수교 또한 중국 전도를 노리다가 가경(嘉慶) 12년(1807) 영국의 모리슨의 내화를 계기로 예수교의 전래가 시작되었으니 중국 기독교사의 제 3기를 장식한 것이다. 광주(廣州)에 잠입한 모리슨은 도광(道光) 14년(1834) 그가 죽기까지 27년간 <성경>번역·서적인쇄·세례 전도 등 많은 공작을 통해 예수교의 기초를 닦았다.

모리슨의 뒤를 이어 많은 예수교 전도사가 중국에 들어왔고, 더구나 도광 22년(1842) 홍콩을 상항(商港)으로 연 뒤 신교의 전도는 활발하여 드디어 공리종(公理宗)·신의종(信義宗)·성공종(聖公宗)·침신종(浸信宗)·안식종(安息宗) 등 다섯 종파로 나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당 태종 때부터 이미 1300여 년에 이르는 중국 기독교를 통해 볼 때 동서학술 교류나 과학의 발전에 있어 기독교의 중국 발전에 대한 공헌은 적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서양 과학 지식을 중국 지성인에게 소개함으로써 신심을 유도했다.

마테오 리치의 <기하원본(幾何原本)> 및 수학 서적과 판토야의 <인류원시> 등의 천문학 서적을 비롯하여 중국에 최초의 식물학 연구를 소개한 등옥함(鄧玉函)의 <중국본초(中國本草)> 8000여 종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과거가 아직도 성행했던 중국에 새로운 교육기관으로서 학교를 설립했으니, 홍콩의 영화서원(英華書院), 복주(福州)의 육영여학(毓英女學), 상해의 성요한(聖約翰)대학, 영파(寧波)의 육영의숙(育英義塾) 등을 들 수 있거니와 중국이 유신변법(維新變法)을 기해 과거를 폐지하고 학교를 설립하는 데 추진 작용을 담당했고, 사회적으로도 병원·고아원·맹아원·적십자·구제회 등 사회사업을 일으키게끔 직접 그 선봉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사상적인 변혁을 가져 왔다. 전통적인 종법사회를 개화시키면서 소가정 제도나 남녀평등, 혼인 자유를 고취했고, 귀신이나 풍수 ․ 점술에 경혹하는 미신을 타파하는 데 앞장섰고, 고루한 팔고(八股)의 잔재를 불식하면서 새로운 과학 실증주의 사상을 도입하는 데 공헌을 세웠다. 더구나 현대에 이르러 염석산(閻錫山)이 산서(山西)에서 발기한 기독교에 의한 새 도덕의 수립촌이나 장개석(蔣介石)이 발기한 ‘신생활운동(新生活運動)’ 등은 기독교의 영향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반기독교의 풍랑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강력한 유교의 전통에다 견고한 민족사상은 아직도 활짝 세계를 향한 문을 열지 않은 이상 기독교는 아직도 서양인의 종교란 관념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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