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바름(正)에 대하여
아침을열며-바름(正)에 대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9.04 18:5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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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바름(正)에 대하여


나는 이름 탓인지 뭐든 ‘똑바른’(正) 것을 좋아한다. 누가 건드렸는지 연구실 책상 위의 노트북이 약간 ‘삐딱’하게 놓여 있기에 무심결에 ‘똑바로’ 잡아 각을 맞추어 놓았다. 그 순간 뜬금없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날 아버지가 무슨 이야긴가를 하시다가 동네 이웃 할아버지를 들먹이며 “그 양반 참 별나기도 하시지. 글쎄 그 양반은 방구석에 있는 요강의 난초 그림도 정면으로 똑바로 보이게 돌려놔야만 직성이 풀린단다. 헛허허…” 하고 껄껄 웃으셨다. 그 할아버지도 어쩌면 나하고 비슷한 계통이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저 위대한 철학자 공자라면 나나 그 할아버지의 이런 면모를 어떻게 품평했을까. 어쩌면 묘한 미소를 지으며 흐뭇하게 봐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논어}에 보면 공자의 평소 모습을 전하는 제자들의 증언 중에, 1006 漁…而肉 … 割不正, 不食.([생선과 고기는]… 써는 것이 바르지 않으면 들지 않으셨다)…席不正, 不坐.(자리가 똑바르지 낳으면 앉지 않으셨다) 君賜食, 必正席先嘗之.(임금이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자리를 똑바로 하고 먼저 맛을 보셨다) 升車, 必正立, 執綏.(수레에 오르시면 반드시 똑바로 서서 고삐를 잡으셨다) 같은 말이 보인다. 내 친한 친구의 입버릇 같은 우스개 표현을 빌리자면, “뭘 그렇게까지…” 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이런 증언들은 매사에 바르고자 하는 그의 태도, 자세, 그런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닌 게 아니라 ‘바름’에 대한 이런 집착은 공자의 분명한 가치 중의 하나였다. 아니,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正)이야말로 공자의 가치체계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평가한다. 어쩌면 그 유명한 ‘인’(仁)보다도 더 근본적인, 혹은 더 궁극적인 가치가 아닐까, 그렇게도 평가한다. 이렇게 말할만한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역시 {논어}에 보면, “君子 … 就有道而正焉, …”(군자는 도있음으로 나아가 바르게 한다), …君子正其衣冠,…“(군자는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라는 언급이 보인다. ‘바름’ 내지 ‘바르게 함’(이는 명사로도 형용사로도 자동사로도 타동사로도 쓰임)이 이른바 ‘군자’의 면모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또, “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내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온 후에야 음악이 바르게 되었고 아(雅)와 송(頌)이 각각 제 자리를 잡게 되었다)라는 말을 보면 이 ‘바름’이 음악과 같은 구체적 사안들에 대한 그의 지향점의 하나임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또, “晉文公譎而不正, 齊桓公正而不譎”(진나라의 문공(文公)은 간교하며 바르지 않았고 제나라의 환공(桓公)은 바르며 간교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보면 그가 실제로 이 ‘바름’을 현실 정치인에 대한 엄중한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음도 알 수가 있다.

‘정과 부정’, ‘바름과 바르지 못함’, 이는 실은 ‘정치’를 평가하는 공자의 절대적 기준이기도 했다. 아니, 정치 그 자체를, 그 본질을, 그 핵심을, 그는 ‘바로잡는 것’(正)이라고 이해했다. 季康子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 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다. 공자가 답답해 말씀하셨다. “정치는 바로잡는 것입니다. 군께서 바름으로 솔선하신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멋있는 정치철학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는 이 ‘바름’의 솔선수범도 이야기하지 않는가.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그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 자신이 올바르지 않으면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 “苟正其身矣, 於從政乎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진실로 자기 자신을 바르게만 한다면 정치를 함에 있어서 무엇이 더 필요하겠느냐?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남을 바르게 하겠느냐?) 너무도 당연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공자는 정치의 핵심인 이 ‘바름’ 내지 ‘바로잡음’의 지극히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름을 바로잡는 것’, 이른바 ‘정명’(正名)이다. 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자로가 말했다. “위나라의 왕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하겠답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자로가 말했다. “그런 것도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너무 우원(迂遠)하십니다. 그것을 바로잡아 뭐하겠습니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조야하구나, 유(由)는!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워 두어야 하는 것이다…”(뒷부분은 후대위작의 혐의가 있으므로 생략) 철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 중의 하나다. 제자인 자로는 아마도 공자의 이런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제나라의 경공은 그나마 자로보다는 좀 나았던 것 같다.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제나라의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하는 것입니다” “좋군요! 진실로 왕이 왕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고, 부모가 부모답지 않고, 자식이 자식답지 않다면, 비록 먹을 게 있더라도 내 어찌 그걸 얻어서 먹겠습니까?”) (물론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경공은 실제로 그렇게 훌륭한 왕이 아니었다고 평가되니 현실 정치와 이상은 어디서나 괴리를 피할 수는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공자가 하고 싶었던 정치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름을 바로잡는 것’ 즉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서 그 이름값을 똑바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바를 ‘정’자 하나만 제대로 실천해도 세상은 바로 선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사람들은 올바로 그 이름값을 하고 있는가? 세상은 똑바로 서 있는가? 세상엔 온통 ‘부정’으로 가득 차 있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이는 거의 희귀종, 혹은 거의 멸종위기동물에 속하는 지나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이, 세상이, 올바르지 못하고, 부정이 넘쳐나는 한, 공자의 철학은 끊임없이 되풀이 외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아, 우선은 벽에 걸린 저 삐딱한 액자부터 좀 바로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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