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겸손(謙遜)과 겸허(謙虛)
칼럼-겸손(謙遜)과 겸허(謙虛)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0.17 19:0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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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겸손(謙遜)과 겸허(謙虛)


겸손(謙遜): 남을 높이고 제몸을 낮춤(modesty). 겸허(謙虛): 허심하게 자기를 낮춤(modesty). 국어사전에서 풀이하고 있으며, modesty:겸손·조심성·겸양·수줍음이라고 영한사전에서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커다란 특이점을 하나 발견 할 수 있다. 영한사전에서는 겸손과 겸허의 구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겸허라는 말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겸손의 풀이에는 가식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겸허의 풀이에는 마음을 비운다는 허심(虛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 한 번 우리말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초대 황제 양무제(梁武帝)는 세간에서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숭앙되는 사람이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건너오자 수도 금릉의 궁중으로 모셨다. “나는 즉위 이래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고 스님을 공양하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습니다.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대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공덕(無功德)’ 공덕이 없다는 말이다. 양무제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판단해 다시 물었지만 역시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양무제는 자존심이 상했다. 달마대사 대답의 의미는 공덕을 바라고 하는 선행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며 삶에서 한없이 겸허해지라는 뜻이었다.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을 아는 자이고, 둘은 자신을 모르는 자이다. 자신을 아는 자는 겸손한 자이고, 자신을 모르는 자는 오만한 자이다. 그래서 오만은 우리의 삶을 왜곡시키는 치명적인 것이 된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춘추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다툼이다. 월나라 구천과 오나라 합려와 부차의 역전을 거듭하는 20여 년간의 대장정에서 다양한 고사가 나왔다. 이를 함축한 고사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 가시나무 위에서 자고 곰 쓸개를 핥으면서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다는 말)은 오만에 대한 경고 그 자체이다. 경고의 메시지는 ‘오만 한 자는 패하고 겸허한 자는 승리한다’오만의 문제점은 오만에 빠지면 무엇보다 현실감각이 방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 2008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리만 브러더스의 파멸은 오만한 경영진의 태도가 주원인이라는 진단이다. 창업한 지 160년이나 되는 공신력 높은 국제금융회사가 단 몇 사람의 오만한 태도 때문에 일거에 무너진 것이었다.

우리가 이해할 것은 겸허와 겸손은 다르다는 것이다. 겸손은 표면적이고, 겸허는 내면적이다. 겸손은 세속적인 말이고, 겸허는 종교적인 차원의 말이다. 겸손은 누구나 가장할 수 있다. 겸허는 가장하지 못한다. 겸손은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다. 겸허는 흉내가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겸손한 척한다는 말은 있어도 겸허한 척한다는 말은 없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것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겸손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진정한 겸손, 즉 겸허가 하나, 겸손한 척하는 것이 둘이다. 둘 다 겸손을 표방한다. 척하는 것은 처세의 덕목일 뿐이다. 속으로는 오만하면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는 것이다. 겸손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것은 오만한 자와 마찬가지다. 이들은 겸손을 내세움으로써 남들의 호의를 얻고자 한다. 남들과의 경쟁을 회피하면서 기회를 엿보려는 비겁함과 나약함을 겉으로 보이는 겸손 속에 숨긴다. 진정한 겸손, 즉 겸허는 처세론적 덕목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의 얘기다.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근원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겸허한 자의 생활방식은 겸손한 척하는 사람과 크게 다르다. 이들은 항상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며 자기반성으로 수양을 쌓으면서 신독(愼獨)하며 자기를 절제 한다.

‘주역(周易)’에서 겸손을 뜻하는 괘는 커다란 수확을 뜻하는 대유괘(大有卦) 다음에 나온다. 대유괘는 큰 것을 자진 자는 자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 다음이 겸괘(謙卦)이다. 주역 64괘 중 아마도 가장 좋은 괘일 것이다. 이를 지산겸(地山謙)이라 하며 땅 밑에 산이 있음을 상징한다. 땅속에 산이 들어간 모습으로, 마음속에 잘난 척하는 마음이나 남보다 뛰어난 재주 등을 다 감추어버린 형상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관중이 쓴‘관자(管子)’에서는 ‘자신을 아는 자는 겸허하다’라고 했다. 그것은 현명이다. 세상에 현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적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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