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저녁이었다. 약속이 있어 나가는 차 안에서 군대 간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별 탈 없으니 걱정 하지 말라는 안부의 전화였다. 춥지는 않은 지, 비상이 걸려 많이 바쁘지는 않은 지, 힘들어도 어쩔 수 없으니 수고하라며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었다.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낮에 들은 북한의 김정일 사망소식이 더욱 실감이 났다.
아들은 대학교 2학년을 다니다 작년 6월에 입대를 했다. 입대를 결정한 후 얼마 안 되어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다. 어떻게 폭격이 일어났고 누구의 소행이고 우리 군부의 지휘체계는 제대로 되었는지 시시콜콜 따지는 이런 이야기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하루아침에 아들들을 잃은 부모들의 애끓는 마음에 가슴 아프고,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 버린 젊은 목숨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런 시국에 아들을 군대 보내야하나 잠시 갈등도 생겼다. 남자는 군에 다녀와야 철이 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얼른 다녀오기를 고대했고 기왕이면 제대로 고생도 좀 하고 와서 단단해지기를 바랬는데 이제는 무사히 군대를 다녀올 지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이런 저런 걱정을 뒤로 하고 작년 6월 말에 아들은 입대를 했다. 어떤 부대로 배치 되었는 지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훈련소 상황도 매일매일 확인이 가능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훈련은 어쩌나 했더니 그런 날은 야간에 훈련을 하였다. 장마기간이여서 장대비가 종일 내리는 날은 실내에서 훈련을 했다. 아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는 없지만 내가 훈련소 카페에 올려놓은 편지는 출력해서 일과가 끝난 후 훈련병들에게 전해준다니 아들에게는 이게 유일한 낙일 거라는 생각에 매일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곧 끝이 났다. 헌병을 지원한 아들은 다시 헌병훈련소로 가고 이제는 완전히 통신두절이었다. 며칠 뒤 올라온 훈련소 퇴소 동영상에서 아들 얼굴, 목소리를 듣고야 그동안 무탈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아들의 군 생활은 시작되었다. 이제 나는 훈련소 카페에 매일 글을 남기지 않아도 되었고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당연히 좋고 나쁨을 떠나 군대물품을 쓰고 부족함을 참는 법도 배워야지 사제품을 써서 되겠냐는 부대장의 간곡한 당부편지에 아들이 좋아할 만한 과자도 필요한 물품도 택배로 보내지 않는다. 무슨 날이 되면 여자 친구들이 보내는 무수한 물품들도 바로 그 자리에서 돌려보내지고 생필품을 택배로 보내도 꾸중을 듣는단다. 지급되는 월급으로 필요한 물품을 사야지 집에다 손 벌리지 말라고 한단다. 점점 나는 아들의 부재를 잊고 지냈다. 아들 역시 가뭄에 콩 나듯 간간히 무사히 지내고 있음을 전해올 뿐이다.
그러나 천안함 사건, 연평도 교전 이어 북한 김정일의 사망까지 우리나라가 북한과 대치중인 분단국가임을 일깨워주는 큰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어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부디 김정일의 사망으로 온 나라가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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