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중국문학(中國文學)의 특성(4)
칼럼-중국문학(中國文學)의 특성(4)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1.16 18:2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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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중국문학(中國文學)의 특성(4)


지난번에 이어 중국 문학의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궁체를 성공시킨 한악은 온(溫)과 이(李)를 연습(沿襲)했다. 그리고 천속한 3나와 두순학을 들 수 있는데, 기타 군소 시인들은 거의 중당시를 따르고 있다.

만당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고시와 근체시가 창할 수 없는 도시(徒詩)로 변하고 대신 창할 수 있는 시가로 사가 군림하게 된 것으로, 만당과 5대는 시의 왕좌를 사가 잡게 된 것이다.

‘송(宋)초’의 시단은 서곤파(西崑派)의 독점 횡포와 그에 대한 반발로 번졌다. 양억(楊億)을 수령으로 전유연(錢惟演)·유균(劉筠) 등 17인으로 구성된 서곤체파 시인들은 이상은을 종법하여 용전탁자(用典琢字)한 나머지 오히려 부염(浮豔)한 데 빠졌으나 뒷날 호매(豪邁)한 소순흠(蘇舜欽), 유담(幽淡)하고 청려한 매요신(梅堯臣), 아건(雅健)한 구양수(歐陽脩) 등(특히 구양수를 주력으로)이 서곤체의 공해(公害)를 징청(澄淸)함으로써 송시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 것이다. 구양수의 배식(培植)으로 나타난 소식과 왕안석(王安石)은 각각 개성을 발휘하여 송대의 2대 시인으로 자리를 굳히고 그 아래 많은 시인이 추종 운집하였다. 호방하고 수일(秀逸)한 소식은 스 문하에 황정견(黃庭堅)·장뇌(張耒)·조보지(晁補之)·진관(秦觀) 등 이른바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와 진사도(陣師道)·이천(李薦) 등이 모여 시단에 강세를 이루었는데, 그중 의경(意境)이 청신한 황정견과 진사도·진여의(陣與義) 등은 ‘강서시파(江西詩派)’를 이루어 도잠과 이백 · 두보를 모방했다.

‘남송’에 이르러서는 남송 4대가라 불리는 우무(尤袤)·양만리(楊萬里)·범성대(范成大)·육유(陸游) 등이 출중했으나 모두 강서시파에서 나온 시인들이었고, 송말에는 이른바 영가사령(永嘉四靈)인 서조(徐照)·서기(徐璣)·옹권(翁卷)·조사수(趙師秀) 등이 5율에 능했으나 품격이 좁아 별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남송 때 북방은 금인(金人)의 천하였고, 또 그들이 남하하여 송을 멸하자 그 뒤 명이 원을 몰아낼 때까지 한의 문화는 일찍이 없던 위협에 당면했다. 따라서 이 동안에는 시사(詩詞)가 쇠침하고 대신 희곡이 성하게 되었다. 이런 시련은 송 이후의 고시·근체시·사의 작가들을 적막하게 했고, 또 산출된 작품들은 거의 모방적이고 진부한 것들이어서, 그 중에 내놓을 수 있는 시인으로는 금말·원초의 원호문(元好問)과 원대의 4대가로 불리는 우집(虞集) · 양재(楊載)·범형·게혜사(揭傒斯) 외에 조맹부(趙孟頫)·양유정(楊維楨) 정도였으나 어느 한 사람도 원호문을 능가하지 못하였다.

‘명대’의 시도 문학사에서는 그 주력을 소설과 곡에 빼앗겨 쓸쓸하였다. 성당시를 배우려는 복고의 노력이 있었지만 국격(局格)이 낮고 비창조적이어서 볼 만한 것이 많지 않다. 명초에는 이백을 배운 고계(高啓)와 두보나 한유를 공부한 유기(劉基)를 명가로 내세울 수 있으나 한아(閒雅)한 풍격으로 태평을 노래하려던 3양의 ‘대각체(臺閣體)’는 진지하지 못하였다. 명대 중엽에는 전후 7자가 성당을 모방했지만 서툴기만 했고, 이들 전후 7자를 배격하고 백거이와 소식을 표방한 공안파(公安派)의 원종도(袁宗道)·원중도(袁中道)·원굉도(袁宏道)의 시(이른바 공안체(公安體))는 오히려 이속적인 부분이 빠졌고, 또 이들 공안파를 교정(嬌正)코자 했던 경릉파(竟陵派), 종성(鐘惺)·담원춘(譚元春) 등의 시(이른바 경릉체)는 오히려 고초(孤峭)한 데 빠져 그들(공안과 경릉)의 풍격은 결국 전후 7자에 따르지 못했다.

‘청대’는 학문상으로나 창작상으로 모든 것이 총집성되고 부흥하던 시대다. 시도 어느 체재를 막론하고 모두 시도되었다. 청초 시단은 강좌 3대가에 의하여 고시와 근체시가 다산됨으로써 청시기풍을 열어 두었다. 그 뒤 왕사정(王士禎)이 당인절구(唐人絶句)를 찬미하면서 신운(神韻)을 주장하여 한때의 시종(詩宗)이 되었으나 심덕잠(沈德潛)은 격률(格律), 옹방강(翁方綱)은 기리(肌理), 원매(袁枚)는 성령(性靈)을 주장, 각각 신운파(神韻派)와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청 중엽 이후의 시단은 크게 성조격률(聲調格律) 위주의 성당 모방파와 신운을 주장하는 유심파(唯心派), 명의 공안 및 경릉을 이어 시의 철저한 자유와 성정(性情)을 주장한 성령파(性靈派)로 정립되었다. 이는 또한 학당(學唐)과 학송(學宋)의 두 조류로도 크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청말에 이르러 다시 강서파를 따르는 무리도 많아져 혼란현상을 빚었으나 드디어 역시(譯詩)의 유행과 때를 같이하여 황준헌(黃遵憲)의 ‘아수사아구(我手寫我口)’란 신체 자유시의 제창을 계기로 신시 개혁의 기운이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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