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공신(功臣) 책정의 허와 실
칼럼-공신(功臣) 책정의 허와 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12.26 18:5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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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공신(功臣) 책정의 허와 실


조선시대 공신이 되면 회맹(會盟)이라고 해서 왕이랑 같이 잘 먹고 잘 살자는 맹세를 한다. 즉 왕조 국가에서 권력의 정점인 왕과 함께 논다는 것이다. 또 대대손손 그 명예가 전해진다. 실질적인 포상도 만만치 않아, 영작(榮爵:영예로운 작위)과 토지, 노비를 내리고 그 자식들에게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졌다. 그러다보니 공신 중에는 진짜 공을 세운 이들도 있지만, 정치적 이유나 목적에 따라 책봉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먼저 조선 제1대 공신이라 할 수 있는 개국공신 52명을 보면 이성계와 역성혁명 세력에게는 공신일지 모르지만, 고려 왕조로서는 역신(逆臣)이다. 같은 의미로 단종 시절 안평대군과 김종서(金宗瑞)를 숙청하는데 앞장선 정난공신(靖難功臣)은 43명인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이후 단종을 쫓아내고 세조를 옥좌로 밀어 올린 공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이 된다. 이들 역시 세조에게는 충신이자 공신이지만, 단종에게는 역신이다. 특히 한명회(韓明澮)는 세조를 정국의 핵으로 부상시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책사로 정난공신, 이후 세조를 왕위로 밀어 올리는 데 공을 세워 좌익공신을, 예종 때 남이(南怡)의 옥사를 담당했다고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선정되었고, 성종을 왕위에 밀어 올린 공을 인정받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라 공신 4관왕의 타이틀을 기록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혹은 그 덕분에 공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총 189명이다. 이를 세분화하면 4개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일단 공신의 숫자로 살펴보면, 임진왜란이 터지고 선조가 몽진(蒙塵)에 올랐을 때 끝까지 따라갔다는 이유를 공으로 인정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고 하여 86명, 광해군의 분조 활동을 도왔던 공을 인정받아 위성공신(衛聖功臣)이라 하여 80명, 임진왜란 3대첩의 주역인 전쟁 영웅들을 선무공신(宣武功臣)이라고 하여 18명, 왜란 당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였다 하여 청난공신(淸難功臣)이라고 하여 5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위성공신 80명은 선조 시절에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광해군 5년에 정권창출에 공이 있다하여 공신으로 책봉이 되었었는데 광해군이 폐위되자 이 훈호도 같이 삭제되었다. 결국 임진왜란을 통해 공신이 된 이들은 위성공신을 제외한 109명이다. 이들 중 청난공신은 좀 애매한데, 왜란 극복에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들이 한 일은 반란 진압이었지 왜군을 격퇴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게 보면 왜란 극복에 보탬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왜란 때 실전에 참가한 공신은 선무공신 18명과 호성공신 86명이다.

임진왜란 7년 동안 피땀 흘려가며 왜놈과 싸운 이들 중 그 공적을 인정받은 이가 겨우 18명인데, 이들과 동급으로 취급받은 호성공신은 무려 5배 가까이 많은 86명이나 된다. 어찌하여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가장 큰 문제점은 선무공신의 선정에 문제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1등 공신: 이순신, 권율, 원균. 2등 공신: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3등 공신: 정기원,권협,유충원,고언백,이광악,조경,권중,이순신(충무공 이순신 장군 휘하의 동명이인), 기효근,이운룡. 즉 1등 3명, 2등 5명, 3등 10명 총 18명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두 가지 숨겨진 법칙이 있었다. 첫째 선무공신 책정의 원칙은 임진왜란 3대첩 참가자에 한정되었다는 것이며 둘째 선무 1등 공신은 무조건 죽은 사람만 울린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원균이 1등 공신에 올라간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호성공신 86명이다. 단순히 왕이 도망가는데 따라갔을 뿐인데, 공신이라니… 86명 중에 내시가 24명이고, 마의(馬醫)가 6명, 의관(醫官)이 2명…별좌사알(別坐司謁: 임금의 명을 전달하던 잡직)도 2명이나 된다.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정한 공신은 문제가 참으로 많은 것 같다. 목숨 걸고 싸운 진짜 공신들은 찬밥 취급하고, 자기 곁을 지킨 이들은 애지중지하였던 모습…. 일국의 왕으로서는 부적절한 모습이 아니었던가? 한다. 목숨 걸고 싸워봤자 후방의 권력자 옆에 줄 서는 것이 훨씬 더 출세가 빠르다면, 어느 누가 나라 위해 목숨을 걸겠는가?

한해를 마무리 하는 세모에 각종 훈장이나 상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 같다. 혹 정치적 이유로 남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살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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