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 타고 다니던 ‘시민 속의 의장님’
시내버스 타고 다니던 ‘시민 속의 의장님’
  • 허홍구 기자
  • 승인 2011.06.1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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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김은하 전 진주시의회 의장

▲ 제4대 진주시의회 김은하 전 의장
진주시의회 2, 3, 4대 의원과 제4대 전반기 의장을 지낸 김은하(72) 전 진주시의회 의장. 김 전 의장은 3선의 진주시의원을 지낸 뒤 지금은 평범한 시민의 한사람인 ‘야인’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나무를 가꾸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초기 시절 정치에 입문해 12년간 진주시의원으로서 활발한 의정활동과 논리정연한 언변으로 지방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김 전 의장은 4대 진주시의회 의장을 맡으면서 출퇴근에 의장 관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이를 의정활동에 반영하는 ‘시내버스 타고 다니는 의장님’으로 유명하다.

 ◇낙후지역 발전 위해 정치 입문
김은하 전 진주시의회 의장의 현역시절 지역구는 진주시에서도 대표적인 낙후지역으로 꼽히는 옥봉동이다. 그는 진주시 금산면 송백리 출신이지만 진주시내로 옮겨오면서 옥봉동에 자리를 잡았고, 은퇴한 지금도 옥봉동에 살고 있다.
김 전 의장이 정치에 입문할 즈음인 1990년대 중 후반 진주시가 평거동과 하대동 등 신흥주거지는 계속 개발되고 있는데 반해 그가 살고 있는 옥봉동은 여전히 개발이 않아 주민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정치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만해도 옥봉삼거리에서 봉래초등학교까지는 인도도 없는 왕복 1차선도로로 출퇴근시간이면 차량들이 뒤엉켜 극심한 교통체증은 물론 학생들이 사고 위험을 무릅쓰고 차량사이를 곡예하듯 피해서 등하교를 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지역주민들은 진주시의 도시개발 정책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 시정책임자들에게 전달해야하는지, 어떻게 문제를 접근하고 풀어나갈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김 전 의장은 이러한 지역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수십년간 낙후지역의 오명을 가지고 있는 옥봉동의 개발을 위해 지방정치에 뛰어들게 되었다.

▲ 김은하 전 진주시의회 의장이 시정 주요 현안에 대해 의원간담회를 주재하는 모습.
◇옥봉동 지도 바꾼 풀뿌리 일꾼
제2대 진주시의회에 당당하게 입성한 김 전 의장은 ‘옥봉동의 지도를 바꾼다’는 각오로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의정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자신의 지역구를 한바퀴 돌면서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또한 퇴근 후에도 반드시 지역구를 한바퀴 돌면서 주민들의 어려움이 무엇이며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의정활동에 반영했다.
그는 임기동안 해결해야할 지역현안에 대해 나름대로의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한가지씩 차근차근 해결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당시 최대현안이었던 옥봉삼거리에서 봉래초등학교간 도로 확장과 인도개설, 사람하나 비켜가기 힘들 정도로 거미줄처럼 얽켜 있던 마을길을 확장하고 직선화하는 소방도로 개설에 이어 의곡사에서 동방호텔간 하수로 인해 여름철 집중호우때 마다 피해를 입었던 저지대지역의 상습침수 해결 등 지역현안을 풀어나갔다.
뿐만 아니라 옥봉동지역은 저소득 주민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김 전 의장은 살 곳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지역주민들에게 임대주택을 알선해 주는 것은 물론 마땅한 직업을 구하지 못해 자녀들 학교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있는 주민을 진주시청 환경미화원으로 소개하는 등 지역발전은 물론 주민의 사소한 문제까지 해결해주는 ‘풀뿌리 일꾼’으로 역할을 다했다.

▲ 제4대 진주시의회 의장을 맡아 의회 본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김은하 전 의장.
◇4대의회 전반기 의장 맡아
초선시절부터 남다른 열정과 의욕으로 지역개발과 진주시의 발전을 위해 활발한 의정활동을 벌여온 김은하 전 진주시의회 의장은 재선이던 제3대 의회 후반기에는 부의장을 지냈다.
또한 2002년 지방 동시선거로 3선에 성공한 그는 전반기 의장을 맡아 진주시의회를 이끌었다. 김 전 의장 이전에는 심심찮게 의장은 물론 의원들의 돌출적인 행동이나 비리로 시의회가 시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가 2년 동안 진주시의회 의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이러한 말썽이 한건도 발생하지 않은 것은 물론 집행부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견제로 진주시의회가 한층 성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는 의장직을 맡은 2년 동안 공식적인 행사를 제외하고 출퇴근에 관용차를 사용하지 않고 시내버스를 타고 출퇴근 하는 의장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관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시내버스를 이용한데 대해 그는 “의장으로서 좀 더 많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관용차를 타고 다니기보다는 시내버스를 많이 이용했다”며 “그때 자신을 알아보고 많은 이야기를 해 준 시민들과 시내버스 기사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김 전 의장은 유명강사를 초빙강연 등에는 사천시의회 의원들을 초청해 같이 연수를 하면서 인근지역 의회와의 상호 교류 확대는 물론 의회 예산절감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3선 지방의원 마감 ‘야인’돌아가
제4대 진주시의회 전반기 의장까지 지낸 김 전 의장은 2006년 실시된 지방선거에는 후배들에게 지방의원의 길을 터 주기 위해 불출마를 선언하고 야인으로 돌아가 지금은 고향인 진주시 금산면 송백리에서 느티나무 1000여그루를 가꾸면서 평범한 시민으로 생활하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진주고등학교와 부산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홀로된 부친을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당시만 해도 화학을 전공한 교사들이 부족하던 시절이여서 인근의 진양고등학교에서 화학교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농사를 지으며 교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진주 동명고등학교의 전신인 해인고등학교로 옮겼으며, 경상대학교에 출강하다가 진주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화공약품취급 전문점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는 시의원으로 당선되면서 화공약품점도 자신의 친인척이 아닌 그동안 사업체를 같이 운영하며 고생한 직원들에게 넘겨줬다.

◇타고난 효자에 성공한 아버지
김 전 의장은 2남2녀의 자식들을 모두 휼륭하게 키웠다. 그는 자식들에게 부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라며 모두에게 자연계 공부를 시켰다. 이러한 부모의 뜻에 따라 자녀 넷 모두 학교공부도 우수해 장남은 서울대 치의대를 졸업하고 역시 같은 대학을 졸업한 며느리와 함께 서울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차남은 연세대학교 토목공학과를 나와 지금 토목설계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으며, 큰 딸은 경상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으며, 작은 딸 역시 경상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16년째 근무하고 있다.
김 전 의장은 “3번의 진주시의원을 지내면서 큰 과오없이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은 진주시민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지금은 아주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고 있지만 고향인 진주가 좀 더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로 발전하는데 부족하지만 내가 작은 보탬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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