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황 회장과의 일문일답.
-김동리 선생에 대해 소개하자면
-김동리 선생이 사천 다솔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김동리 선생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생이 기껏해야 일제 징용을 피하거니 수양 차 다솔사를 찾아 한동안 은거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선생은 다솔사가 있는 사천에 20대 초반 약관의 나이에 홀연히 와서 장장 11년 세월의 청춘을 바쳐 일제에 항거하며 대부분의 문제 작품을 쓴 제2의 고향이다. 선생은 1935년 23세에 다솔사를 찾은 후 대표적 작품 대부분을 이곳에서 썼다. 또한 동양철학자이며 사상가인 그의 큰형인 범부 선생 가족과 어머니까지 이곳 다솔사 아래 용산리에 모두 이사해 사셨고, 선생은 곤명 원전리에서 당시 사천 출신으로 진주 일신여고를 나온 함양 백전보통학교 교사였던 김월계와 결혼해 4남매를 낳았다. 이렇게 볼 때 선생에게는 사천이 제2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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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불’의 작가 김동리는 사천이 제2의 고향
20대 초반부터 10여년간 정착 집필 항일 활동
다솔사서 한용운 최범술 김법린에 영향받아
‘등신불’ 등 대표적 작품 대부분 구상 집필해
김동리다솔문학제 다솔사에서 해마다 개최
송도근 사천시장 문학계 도움으로 행사 마련
김동리문학관·다도역사관 건립 위해 혼신
김동리의 사천생활 소재 영화도 제작 추진
사천 곤명일원 김동리흔적 관광상품 개발
영화세트장 만들면 관광자원으로 큰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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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37년부터 다솔사 소속으로 곤명면에 위치했던 광명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았는데 기미가요와 군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매일 일본 순사가 찾아와 감시를 한 끝에 1942년 학원이 강제폐쇄를 당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일제하 어용문학단체 가입 권고를 거절하고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42년 학원 폐쇄 후 일제 징용 영장이 나왔다는 정보를 듣고 만주 등지로 방랑하다가 하동의 후배 집에서 은거하며 소설 ‘역마’를 구상하게 됐고, 해방 후인 1946년 서울로 이사했다.-김동리 선생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등신불’이 다솔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집필됐는데
▲‘등신불’은 1958년 발표돼 다솔사와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선생이 다솔사에 있을 때 기록을 해 둔 것이 작품으로 발표 된 것이다. 다솔사와 최범술 주지의 영향으로 선생이 모티브를 잡은 작품인 것이다. 당시 다솔사에는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주지 최범술, 불교학자 김법린, 불교철학을 연구 교육하는 데 힘쓴 선생의 형 김범부 등이 은거하면서 독립 운동을 했다. 선생의 자전 에세이에 보면 다솔사에 있던 ‘소신대’를 두고 만해 한용운과 범부, 범술 세분의 소신공양 이야기에 충격을 받아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소설의 등장인물인 주인공 ‘나’는 일본 대정대학 재학 중인 학병으로 되어 있는데 대정대학은 최범술 주지가 다닌 대학이다.
-2015년부터 김동리 다솔문학제를 열고 있는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김동리 선생은 사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곳이지만 지역민들이 이 사실을 제대로 몰라 안타까움이 매우 컸다. 이에 지난 2015년부터 주위의 뜻있는 분들과 송도근 사천시장의 도움으로 김동리 다솔문학제를 열고 있다. 그동안 빠듯한 재정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3회째를 맞는 올해는 사천시가 3000만원의 예산 지원을 약속한 바 있어 행사가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동리 다솔문학관과 다도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선생은 다솔사와 곤명면 봉계리 서포리 해변가 등에서 무속적 자료 채집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고 이에 따른 소설 구상기반을 다지면서 결혼도 사천 곤명 처녀와 했고 슬하게 아들을 넷이나 두었다. 선생에게 이보다 더 소중한 공간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때문에 사천에 김동리문학관을 건립하는 것은 필연적인 숙명이다. 김동리 선생이 있었기에 제자인 박경리와 이병주 선생이 있게 된 것이다. 다솔사는 아울러 우리나라 ‘다도문화’의 중요한 곳이다. 절 뒤의 차밭은 ‘반야차로’라고 하여 다솔사를 ‘다사(茶寺)’로 알리게 됐고 최범술 주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도(茶道) 개론서인 ‘한국의 다도’를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문학관 건립과 함께 다도역사관을 같이 건립을 추진하는 것이다. 규모는 문학관 420평, 다도역사관 420평 등 820평이다.
▲물론 많은 예산이 들어간다. 현재 계획대로라면 360억원 가량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체육관광부에 국비를 요청하고 경남도와 사천시에 지방비를 신청하고 기업체의 후원금을 통해 예산을 확보할 계획이다.
-김동리 선생의 사천 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 제작도 추진한다는데
▲앞서도 말했듯이 선생은 사천에서 이곳 출신의 여교사와 결혼을 해서 네 명의 아들을 얻었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생활하면서 다솔사를 비롯한 곤명면과 사천읍 일원 곳곳에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소재들을 바탕으로 영화 ‘첫사랑’을 제작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곤명면 일원에 영화세트장을 만들면 관광자원으로서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리 선생으로부터 아호를 선사 받았다고 하던데
▲제가 경상대 도서관에 근무할 때 김동리 선생 댁으로 출장을 간 일이 있다. 그 분은 근엄하셨고, 서재에는 그 분이 쓴 휘호들이 즐비했다, 돌아온 뒤 선생이 필자에게 ‘청풍(淸風)’이라는 아호를 내려 주셨고 요즘 들어 아호를 사용하고 있다.
▲2009년 진양도서관장으로 재직할 때 ‘문학예술 여름호’에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을 했다. 수상작은 ‘편지’, ‘도서관’, ‘결혼상담소’이다. 심사위원인 문병란, 이일기, 장윤우 시인들로부터 저의 시편들은 이미지가 명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를 쓴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려서 어렵게 공부를 하면서 체득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작품 속에 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교육적 메시지도 많이 담고 있으며, 30대 중반에 홀로 되신 장모님과 교직이 천직인 아내에 대한 애증을 표현한 작품들도 좀 있다.
-공직생활을 오래 하셨는데
▲1981년에 경상대 도서관 사서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진양도서관장, 산청도서관장, 경상대도서관 공공도서관장을 역임하는 등 25년간 근무했다. 도서관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양한 문학의 저변확대를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생각했고 주변에 많은 도움도 줬다. 이제는 이러한 생각들을 지역에서 공유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디지털 이동도서관과 피자독서대회, 예절 독서대회, 기초질서 독서대회, 가족신문만들기 등 활자와 친밀해질 수 있는 여러가지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진주중앙문인회, 산청문협, 남가람 문학회에서 같이 활동하며 고생한 것들에 보람을 느낀다. 현재는 한국문인협회와 경남문인협회, 경남시인협회 회원과 세계펜문학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무역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는데
▲홍삼제품과 홍삼 원료 화장품을 중국과 베트남에 수출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과 베트남을 찾는 시간이 많다.
황규홍 회장은
△사천시 곤명면 출생 △경상대 대학원 교육학 석사 △경상대 도서관 공공도서관장 △진양도서관장 △산청도서관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남시인협회 회원 △진주남가람문학회장 △이형기문학제 사무국장 △시와지역 발행인 △김동리 다솔문학제 추진위원장 △김동리 문학관 및 다도역사관 추진위원장 △사천문인협회 회장 △시집 ‘정글에서 책을 읽다’‘사량도 옥루봉 일출’ △수필집 ‘남산에 눈 내리는 날’
김영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