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중국문학(中國文學)의 특성(11)
칼럼-중국문학(中國文學)의 특성(1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2.19 18:0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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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강신웅/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 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중국문학(中國文學)의 특성(11)


지난번에 이어 중국 문학의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문’이란 광의로는 모든 분야의 문학을 총괄하지만 시․사(詩詞)와 소설․희곡이 분립된 뒤부터는 협의의 산문만을 일컫는다. 그런데 중국의 산문은 근본적으로 음악성을 지녀야 했고 조직적으로 기우(奇偶)의 배합성을 지녀야 했다. 산문이라 해도 낭독되어야 했고, 그 구성이 마치 인체 조직과 같이 어느 것은 기수, 어느 것은 우수로 조성되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산문은 기율(奇律), 즉 비음악적이거나 비대우적인 자유체를 말한다. 하나 미는 기우상배(奇偶相配)한 데 있다. 구태여 기우를 가릴 것 없으나 진․한(秦漢) 때 변문(騈文)이 나오면서부터 문장에는 기문과 변문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그 구별은 엄격한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기필을 많이 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산문의 종조(宗祖)로 여기게 되었고, 비교적 우필을 많이 쓴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변문의 종조로 여기게 되었다. 진한 이전의 문장에는 결코 의식적인 산문이나 혹은 변문의 구별이 없었다는 것은 주대(周代)에 나온 <주례(周禮)>․<의례(儀禮)> 중에도 <주례>가 우필을 많이 썼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의례>는 기필을 많이 쓴 것이나 <문언(文言)>․<춘추(春秋)>는 다같이 공자가 저술한 것이지만 <문언>이 변문 쪽에, <춘추>가 산문 쪽에 속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런 ‘기중유우, 우중유기(奇中有偶, 偶中有奇)’의 배합이 무너진 ‘한대(漢代)’에 이르러선 변문이 많아지다가 위․진․남북조 시대에 조씨(曺氏) 삼부자(三父子)와 건안칠자(建安七子) 등의 문장에 이르러서는 현저히 변문에 치중하였다.

위․진․남북조 문장이 변문에 풍미되었음은 당시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과 예사지학(隷事之學)의 제창에 따른 영향이겠고, 한편 형식의 미만 좋아하여 교묘하고 연려(姸麗)한 것을 따르던 풍조 때문이었다. 사영운(謝靈運)․포조(鮑照)․심약(沈約)․임방(任昉)․유신(庾信)․서능(徐陵) 등의 글이 그랬거니와 중국 초유의 문학론적인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도 변체로 씌어 있다. 화려한 변문은 ‘당초’의 4걸이 모두 호수(好手)였으나 한유(韓愈)의 고문부흥 운동에 이르러 다소 지양되었고 산․변의 쟁구(爭驅)는 여전하여 오히려 ‘사륙문(四六文)’의 변체가 나오게 되었다. 진대(晉代) 배자야(裵子野)의 <조충론(雕蟲論)>, 북주 소작(蘇綽)의 <문질론(文質論)> 등이 일찍이 변체의 화미(華靡)를 규탄한 바 있지만, 복고 운동에 이르러 변문이 가세되었으니 이에 호응한 사람이 곧 이관(李觀)․유종원(柳宗元)․장적(張籍)․이한(李漢) 등이었다. 그러나 당대의 공문서에 이르기까지 변문을 사용한 여세는 송대도 미쳤으니, 당대를 통하여 변문에 능한 명저가 많았다. 다만 만당에 이르러 변문의 변체인 ‘사륙문(四六文)’이 정칭(定稱)되어 드디어는 이상은(李商隱)이 변문 20권을 <번남사륙(樊南四六)>이라 하여 편집케 된 것이다.

당대의 변문은 육조에 비해 형식에 구속되어 풍격이 미약해졌고, ‘송대’에는 ‘고문’과 ‘사륙문’이 병존했다. 송초에는 고문 일파가 쇠락하다가 유개(柳開)․손복(孫復)․목수(穆修) 등에 의해 다시 한유․유종원의 전로를 밟았으나 고문운동의 본격적인 전개는 구양수(歐陽修)를 비롯한 매요신(梅堯臣)․소순흠(蘇舜欽)․소순(蘇洵)․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소철(蘇轍) 등의 쟁쟁한 명류(名流)에 의하여 활발해졌다. 이들 팔가(八家)들이 주동이 된 고문운동은 고문 즉 산문을 문장의 주류로 회복시켜 놓은 것이다. 그러나 송대 관서(官署)의 고문은 여전히 사륙문으로 통행되어 고문작가라 해도 사륙문을 아울러 지으면서 사륙문의 낡은 껍질에 고문 정신을 접하기 위한, 이른바 ‘송사륙’을 새로 형성시킨 것이다. 당대 사륙문이 대우(對偶)가 정교하고 자연스러운 데 비하여 송대 사륙문은 표현이 평담하고 청공(淸空)한 것이 각각 특색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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