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 외곽(진양) 3·1운동사
진주성-진주 외곽(진양) 3·1운동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3.08 18:2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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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진주 외곽(진양) 3·1운동사


1919년 3월 10일 새벽에 진주시내 도청, 군청 인근에는 김재화 선생이 집현면 하촌리에서 지으신 격문(교유문)이 나붙기 시작했다.

“삼남지역은 왜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요지로 의거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 때 일경은 초비상이 걸려 엄중한 조사와 경계를 펼치며 각 학교 학생들을 귀향시키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정촌면 관봉리에 사는 강재순 자택을 찾은 이병홍(광복후 국회의원)은 서울에서 가져 온 <독립선언서>를 주고 갔다. 곧 강재순은 허현·이종렬·강한순·서기봉·이준이 등과 함께 5000여명을 모아 칠암동, 망경동까지 진출하며 시위를 전개하다 크게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미천면은 3월 20일 박봉제(박윤호)·김윤권(김치홍)·노기주 등이 12인의 독립의우회를 조직해 700여명의 군중을 모아 안간리까지 5km를 행진하며 시위하고 박봉제 의사는 자신의 두루마기를 찢어 즉석에서 <대한독립>이라 쓰고 장대에 달아 시위를 지도했다.

반성장터 3·1운동은 이반성면 발산리 출신 김기업 의사가 주민들을 이끌고 약 6km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일경의 눈을 피해 함경도 웅기까지 피신했다가 경상도 말씨 때문에 발각·체포되어 진주지법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명석면 3·1운동은 강달영·박진환 등과 교류하던 김용익 의사가 면민들을 이끌고 시내까지 진출하며 시위하고 일경의 눈을 피해 서울의 임시정부 관계자를 만나 임시정부 관련 문서와 총(銃)을 받아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수합하다 일본 순사와 총격전을 전개했고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금산면 3·1운동은 강용수 의사가 3월 20일 2000여 명의 군중을 모아 시위했고 공적비가 금산초등학교 담장 아래에 세워져 있다.

내동면 3·1운동은 삼계리 출신 박재호·박재표(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함)의 아우 박재수 의사가 권도용·강대창·박재룡 등과 함께 경남유림대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진주시 대안동 유일여관에서 격문 <조선독립충고문>등을 작성해 배포하다 체포되어 6년~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문산읍 3·1운동은 3월 25일 소문리 장터에서 제갑석(제몽고)·강찬영 의사들이 앞장서서 시위를 지도하다 피체되어 제 의사는 옥중순국하고 강찬영 의사는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문산읍에 기념비가 건립됐다.

금곡면서기 김영재와 금산면 가방리 이교윤 의사가 “만민은 열복하고 충절을 다하자”라는 격문을 곳곳에 붙이고 <조선독립협력서>를 작성하고 3월 22일 23일 양일간 시위하다 피체되어 징역 1년~10월형을 각각 언도되어 옥고를 치렀다.

금산면 갈전리 조동숲에 127인을 기리는 진주·진양 항일투사추모비가 2001년에 건립되었고 보훈시설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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