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악명 높은 고성 미곡통제조합
진주성-악명 높은 고성 미곡통제조합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4.12 18:1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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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악명 높은 고성 미곡통제조합


경남 각 시·군에는 총독부 소속의 미곡통제조합이 있었고 부산지소 아래 27개 출장소가 있었고 진주에도 식량검사출장소가 있었고 고성, 사천, 하동, 산청에도 식량검사출장소와 미곡통제조합이 있었고 해안지역에는 수산물검사소가 있었다. 출장소장들은 100% 일본인들로 구성됐다. 미곡 통제와 검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농민/어민들이 피땀 흘리며 생산한 곡식, 수산물을 미곡 통제 및 검사를 거쳐 쌀, 보리, 콩, 팥, 밀, 귀리, 옥수수 등 모든 곡식에 대하여 사고 팔 때 통제를 받았고 시·군별 농회, 미곡통제조합, 식량검사소, 수산물검사소 등으로부터 철저한 통제를 받았고 면별 대표, 마을별 대표를 세워 농민, 어민들 마음대로 시중에 팔지 못하게 했다.

모든 곡식과 수산물을 총독부령으로 묶어 놓고 미곡검사규칙을 정했다.

1932년 10월부터 곡물과 수산물의 수탈과 원활한 수급을 위해 국영으로 변경해 조선총독부와 경남도 산업과 소속으로 만들었다. 모든 일본인 공직자와 친일 주구들은 군복에 허리에 칼을 차고 마을을 순찰.감시했다.

일제당국은 일본 또는 국내에서 거래되는 곡물, 수산물을 반드시 검사소, 통제소의 검사를 거치도록 엄중 관리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1943년부터 식량관리법을 공포하고 본격적인 전쟁물자의 조달에 집중했다.

증언에 의하면 부산항, 마산항, 삼천포 부두, 통영부두에는 전국에서 공출·수탈한 곡식들을 산처럼 쌓아 둔 광경을 보았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등에 의하면 1년에 30만명이 기아선상에 헤메고 굶어 죽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일제의 악랄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농번기에는 식량수탈, 농한기에는 처녀 공출, 놋그릇, 쇠붙이 등을 강제로 수탈할 때 위 친일단체와 군수·면장·구장·지도원등이 앞장서고 3형제가 있으며 1명이 지명받고 5명 형제가 있으면 2명씩 의무적으로 징병, 징용, 위안부로 잡혀갔다. 농어민들은 초근목피 생활이 계속되었다.

한 마을 당 2명이상 차출되면 친일단체에서 나와 돼지, 닭을 잡고 부침개를 만들어 잔치하며 영광스런 충성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지역 친일파 기준은 다음과 같다. B라는 인물이 3·1운동을 하고 5년간 옥고를 치렀으나 그 이후 생계형으로 면서기, 구장, 곡물통제소, 검사소 직원, 농회 지도원을 역임했으면 절대로 정부포상을 받을 수 없다. 생계형 친일파들이 직접적으로 피부에 닿는 친일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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