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시 옥봉동 고분군
진주성-진주시 옥봉동 고분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4.26 18:05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시 옥봉동 고분군


경상남도 기념물 1호인 진주시 옥봉 고분군(일명 수정봉 고분)은 옥봉동 546번지에 소재하고 현재 97㎡ 뿐이지만 이전에는 상당히 규모가 컸던 것으로 전해 온다.

일제가 불법으로 도굴하기 전에는 고대 가야인(백제계 가야인이었고 신라와 경계지역으로 힘의 균형이 왕래했다)의 안식처로 존재했다.

일제는 1910년 이후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고대 일본인들이 가야 지역을 직할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한다면서 조직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가장 악랄한 적군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경남 일원에 소재한 가야고분들을 도굴하기 시작했다.

일본 어용학자들 세끼노(關野貞), 야쓰이(安井息), 쿠리야마(栗山) 등이 1914년 9월경 작성한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옥봉 고분군에서 나온 부장품이 고대 일본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우리나라 식민지 학자와 쓸게 빠진 이모 교수 등이 고대 왜라는 일본 종족이 한반도에서 도주했다가 다시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남부 일대를 점령했다는 설에 동조함으로서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은 수정봉(옥봉) 고분에서 발굴된 힁혈식 석실묘는 가야 지역이면서 6세기 초기까지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힁혈식 석실묘는 백제계의 석실로 현재 일본 고대사 학자들 조차 임나일본부가 백제 땅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말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이 설치됐다는 시기에 가장 강력했던 신라와 백제가 존재했었는데 일본 세력이 있었다는 주장이 가능한 일인가 묻고 싶다.

지난 날 7기~9기 가야 고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2기 뿐이고 인근에는 주로 영세민들이 거주한다.

나온 유물로는 목단지, 굽다리, 청동바리, 그릇받침, 뚜껑접시, 그릇받침 등인데 일제는 진주경찰서에 일시 보관했다가 일본 동경대학교 공학부로 옮기는 등 도적질을 자행했다.(돌려달라고 청원해야 한다)

옥봉(수정봉) 3호 유물만은 겨우 보존되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갔다가 진주 박물관으로 옮겼고 다시 김해 박물관으로 옮기는 수난이 계속되었다.

옥봉동에 남아있는 2기의 고분도 아무것도 없는 빈 무덤이지만 계속해서 유지될지 의심스럽다. 1974년 2월 16일 진주 옥봉 고분군이란 이름으로 기념물 1호가 되었고 관리자는 진주시로 명시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