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성씨(姓氏)의 유래(由來)
진주성-성씨(姓氏)의 유래(由來)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7.11 18:39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성씨(姓氏)의 유래(由來)


성씨는 사람의 혈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칭호를 뜻하고 핏줄이 같은 사람은 같은 성씨를 갖는 것이 유래로 성씨는 원래 어머니의 핏줄을 뜻했던 성(姓)이라는 말과 조상이나 출신지역을 뜻하는 씨(氏)가 합쳐진 말이다.

성(姓)은 어머니의 핏줄을 뜻하고 반면 씨(氏)는 남성들의 아버지의 핏줄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들이 정착해 살게 된 지명이나 조상의 이름에서 따온 것. 성은 혈통을 씨는 출신 지역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나 점차 성과 씨를 구분하지 않고 성씨로 합쳐 쓰기 시작했다.

우리민족이 성씨를 갖게 된 것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 박처럼 생겼다 하여 박혁거세가 박씨 성을 갖게 되었다. 유리왕의 초기 신라 6개촌장은 각각 이(李), 정(鄭), 최(崔), 손(孫), 배(裵), 설(薛) 이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 삼국유사는 삼국시대 왕족계보를 바탕으로 삼국시대 초기 인물들에게 한자(漢字)식 성과 이름을 붙여 주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는 정책을 시행 조선후기에 족보 매매가 늘어난 것 지방세력의 도움을 받아 고려를 세우고 왕이 된 왕건은 성씨가 없던 지방 세력가들에게 각자 다스릴 땅을 정해주고 성씨를 내려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토성분정 정책으로 이때부터 성씨의 출신 지역을 뜻하는 본관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왕건이 성씨를 내려주었지만 조선 중기 전까지 한반도에 사는 사람중 성씨가 없는 사람은 절반이나 되었고 대대로 천민은 성씨를 가질 수 없었고 평민중에도 성씨가 없는 사람이 있어 성씨를 가진 사람이 더 늘어난 것은 조선후기에 천민이나 평민들이 양반행세를 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양반들로부터 족보를 사들이는 일이 늘어났다. 족보를 위조해 스스로 핏줄을 양반으로 만들고 동시에 그 성씨를 따르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게 된 때는 조선말기인 1909년 인구조사로 신분을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호적제도(民籍法)가 시행된 이후부터라고 한다.

현대의 성씨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많이 생겨나서 그 수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당시 귀화한 성씨로 천(千), 편(片), 팽(彭), 시(施), 화(化), 마(麻)의 성이 시조로부터 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6·25전쟁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남녀 성관계가 문란하고 고아 및 사생아가 많이 생겨 어린시절을 고아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모의 성을 알 수 없어 고아원장이 창씨를 해주었기 때문에 성씨가 많이 불어나 옛말과 같이 만성보(萬姓譜)가 될 것으로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