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고려 건국 1100주년
진주성-고려 건국 1100주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7.12 18:33
  • 14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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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시인-고려 건국 1100주년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은 송악 출신 호족(豪族)왕륭(王隆)의 아들이다. <편년통록><편년강목>을 근거로 <고려사>에 행적이 기록됐다.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당나라 선종의 아들인데 서해용왕의 딸과 혼인해 왕륭을 낳았다고 전해 온다.

왕륭은 서기 896년(신성왕10년)신라의 중앙 세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궁예와 연합세력을 형성해 나간다.

왕륭은 궁예의 군사력이 요구되었고 궁예는 왕륭의 지혜와 경제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궁예는 전국적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도 904년에 마진으로 고쳤다.

궁예는 왕건을 철원태수로 임명하고 이어 송악성주로 세우게 된다. 왕건은 경기, 강원도와 충청도 까지 세력을 넓히고 남해와 서해 해상권을 차지하게 된다.

왕건이 공을 세우자 시중(侍中)에 오르게 되고 911년에는 태봉(泰封)이란 국호로 변경하게 된다.

궁예의 포악함에 반기를 들게 되고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새 세상. 새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이 때 신혜왕후 유씨가 손수 갑옷을 가져다 입혀주고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여 왕위에 올랐다. 궁예는 왕건이 일어났다는 말만 듣고 갑자기 도망가다 죽었다.

견훤왕은 세력이 강화되었고 신라를 침공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왕건은 대구 팔공산 공산에서 크게 패전하고 김락, 신숭겸이 전사하게 된다. 그러나 안동지역의 유금필, 장정필, 김선평, 권행 등이 왕건을 도와 30여성을 차지하게 된다.

935년(태조18년)신라의 경순왕은 쇠약한 나라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왕건에게 투항하게 된다.

견훤은 막내 금강을 후계자로 삼자 신검 등이 견훤을 금산사 미륵암에 유폐시키게 된다.

왕건은 견훤의 사위 박영규와 함께 선산에서 신검세력을 패퇴시킨다. 926년 요나라에 망한 발해유민들을 흡수하여 사국통일(四國統一)과 비슷한 형태가 된다. 왕건은 전국적으로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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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서방 2017-08-05 10:11:59
왕건 만만세 또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