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윤씨가문에 종학서당
진주성-윤씨가문에 종학서당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7.18 18:0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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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윤씨가문에 종학서당-윤씨가문에 종학서당


충남논산에 조선 인조때 파평윤씨 종가(宗家)에 윤순거(尹舜擧라1596-1668)라는 학자가 있어 그는 벼슬길을 거부하고 고향에서 학문에만 열중. 그의 아버지 윤황은 병자호란때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로 유배를 갔고 숙부 윤진은 강화도에서 청나라 군대와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 분쟁이 어려운 상황에 염증을 느끼던 어느날 윤순거 동생 원거, 선거와 함께 교육 즉 서당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데 조정에 신하들은 정치적 분쟁만 일삼는 붕당정치를 계속 나라의 미래를 크게 걱정하며 교육을 통해 바른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우리 문중의 아이들이라도 직접 가르쳐 훌륭한 인재로 키워낼 학당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데” 좋은 생각의 의견으로 1643년 윤순거 형제는 충남 논산에 사는 파평 윤씨 아이들을 위한 종학당(宗學堂)이라 하여 왕족의 자녀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있었지만 문중의 자제를 위해 문중에서 직접 서당을 열었던 일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초대 학장에 윤순거 동생들과 함께 엄격한 학칙 원칙에 따라 아이들을 교육시켰고 윤씨 문중의 자제들은 10세가 되면 종학당에 입학.

학생들은 모두 합숙했고 초하루 보름에 시험을 보았다. 한권의 책을 의문이 남지 않을 때 까지 완전 이해하고 외우고 난 후에 다른 책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암기 후 내용을 이해하는 깊이 있는 공부를 강조하였다. 인성(人性) 교육인 바른 행실과 가정을 다스리는 일 문중 모임의 예법을 익혔고 재화를 운용하는 일 어릴 때부터 경제관념을 갖고 재산관리 등 알려주었다. 종학당은 윤순거와 동생 선거 아들 윤증이 차례로 학장을 했고 점점 이름난 학당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윤증은 당시 서인(西人)의 우두머리였던 송시열의 제자로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을 익히며 종학당을 통해 후진을 양성 일생을 보냈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학당이 폐쇄 4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은 스승과 제자간에 회니시비(懷尼是非)를 계기로 스승과 제자 간에 정치적 원수로 돌아섰다. 회니시비란 송시열의 근거지 회덕과 윤증의 근거지 이산에 벌어진 갈등이라는 뜻이다. 1669년 윤증의 아버지가 죽자(逝去) 묘비명을 스승 송시열에게 부탁 그런데 윤서거를 비판하는 글을 고쳐달라고 하자 거부 이 일로 두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어 갈등은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경신환국이 당파싸움으로 번져 노론의 송시열 소론의 윤증은 두분 대표로 맞섰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 뛰어난 인재를 배출한 노력은 값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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