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길 떠나고 싶은 계절
진주성-길 떠나고 싶은 계절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9.07 18:3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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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길 떠나고 싶은 계절


끝장이라도 낼 것같이 삼라만상을 불볕으로 볶아대던 무더위도 제풀에 물러갔다. 담장 너머의 대추도 볼을 붉히고 석류는 터질듯이 빨갛게 영글었다. 달덩이 같이 커져버린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고 코스모스가 하나 둘씩 피어나며 방싯거린다. 들녘이 노르스름하게 물들어 간다. 가을은 어김없이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다.

가을의 들녘은 농부들의 몫이고 가을의 강은 기러기의 몫이며 가을의 산은 다람쥐의 몫이지만 코스모스 피어있는 가을 길은 길 떠나는 나그네인 여행자의 몫이다. 아침저녁이 선선해지면서 마음은 벌써 길 떠날 준비로 산란하게 설렌다. 어딘가를 몰라도 좋을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누군가를 몰라도 좋을 누구와도 떠나고 싶고, 아니라도 좋아서 혼자라도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길섶마다 손짓하는 코스모스를 길동무하고, 산기슭 돌아가는 모롱이 마다, 피어있는 들국화를 말동무하고, 떠가는 흰 구름의 길 안내 따라, 끝 모르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무엇을 구하려고 그토록 바동대고 누구를 앞서려고 그토록 나부대며 무엇을 보여주려 그토록 우쭐대고 무엇을 찾으려고 돌아볼 줄 몰랐으며 무엇을 남기려고 밤잠을 설쳤던가. 정작으로 나를 잊은 지난 세월이 풀벌레 소리에 뒤돌아 뵈는 계절이다. 다정스런 말 한마디 건넸더라면 멀어지지 않아도 좋았을 사람, 그저 한번 살포시 웃어주었더라면 소원하지 않아도 좋았을 사람, 손 한번 가볍게 잡아 주었더라면 보내지 않았어도 좋았을 사람, 눈 한번 슬그머니 감아주었더라면 미움 받지 않아도 좋았을 사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줬더라면 돌아서지 않아도 좋았을 사람, 마음 한번 다독거려 주었더라면 두고두고 고마워할 그 좋은 사람, 눈길 한번 주었어도 좋았으련만 힘든 기색 역력해도 마음 한 번 못준 것이 가슴을 헤집는데 돌아서던 그 사람은 오죽이나 했을까. 행여나 잊고 있는 이 같은 사연들을 꼭꼭 묻어버리고 감추지는 않았는지 화해와 용서의 계절 가을 앞에서 되새기며 돌아본다. 군데군데 얼룩져도 까마득한 옛길은 그리움이고, 이제는 잊어도 좋을 지난날의 잔상들을 툴툴 떨치고, 하늘하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들국화 저만치서 기다리는 길, 억새꽃 한들한들 손짓하는 길, 끝없는 가을 길을 떠나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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